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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한국사회는 몰상식, 종교도 마찬가지”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한국사회는 몰상식, 종교도 마찬가지”
작성일: 2007년 2월 14일
 

“한국사회는 몰상식, 종교도 마찬가지”
이찬수 강좌 7강…“종교적 차별 아직 덜 부각됐을 뿐”

박용석/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한국사회는 몰상식한 사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아닌 외부의 논리에 지배당하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합니다. 종교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제가 종교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한국 사회 전체에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극단적인 모습으로 들어서 있기 때문에, 현재 제기되는 억압적이며 배타적인 한국 종교 문화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지금까지 커다란 쟁점이 됐던 사상과 지역 차별 문제에 가려 종교적 차별이 그나마 덜 부각되었을 뿐입니다.”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지난 6일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에서 특강을 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은 이찬수 교수의 부당해직을 통해 드러난 종교 사학의 억압과 차별, 배제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이같이 지적했다.


‘관용’이 아닌 ‘용인’과 ‘화이부동’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고 규정지으며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홍 위원은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라면 자신의 오류가 드러났을 때 자신을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오류에 대한 수정을 해야 하는데,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오류를 ‘합리화’ 시키는 동물인지도 모른다”며, 인간을 합리적인 동물로 만드는 요소로써 이성적 자기비판과 통찰의 과정인 ‘똘레랑스’를 제시했다.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를 통해 자기 성찰의 길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똘레랑스’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나와 다르지 않은 남’을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홍 위원은 “‘똘레랑스’는 ‘관용’이 아니라 ‘용인(容忍)’이며 더 정확히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라고 말한다.


관용이란 말엔 남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용서한다는 자기 우월적인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에, ‘똘레랑스’를 ‘관용’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를 ‘틀리다’로 보는 것만큼이나 옳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남의 차이를 구분 짓기 위해 자신의 의식과 논리에 우월성을 찾으려 하고, 이런 맥락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차별, 억압, 배제하는 것을 묵인하며 자신을 합리화 한다”며 인간은 ‘합리적(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 하는 동물’임을 재차 강조했다.

 합리화의 근거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바로 우성과 열성이며, 옳고 그름, 또는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 기준이다. 자기반성 없는 이성이 얼마만큼 위험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타율적인 이성 지배의 심각성

 17세기의 인문학자 스피노자는 ‘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 ‘고집’이 과연 자신이 의식적으로 접한 정보를 통해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인가의 문제인데, 홍 위원은 “한국 사회에 팽배한 고집은 자신이 경험하거나 성찰하지도 않은 의식에 대한 고집”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정보의 원천이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최소한 자신이 성찰하지 못한 지식에 대해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유식’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보가 일상의 곳곳에 넘실대는 현대에는 주워들은 파편적인 정보, 나아가 왜곡되고 과장된 허위 정보를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착각하는 ‘무지’가 넘쳐난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의식이라 믿고 있는 그 의식이 과연 어떤 식으로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무감각이다. “이런 의식 수준으로 ‘남과 다른 나’를 구분 지으며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인간의 행태가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라는 홍 위원의 일갈은 이번 강의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똘레랑스’ ‘자발적 복종’ 등의 개념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를 일관되게 비판하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아울러 절에서 불상에 절을 한 이 교수의 행위에 대해 ‘우상숭배’ ‘이단’이라고 낙인찍어 내몬 강남대나 보수교단의 가르침에 따라 이 교수의 행동에 대해 무작정 비판만 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이기도 했다.




‘너 전라도 사람이지?’

 강의 중 홍 위원은 ‘너 전라도 사람이지’와 ‘너 경상도 사람이지’란 물음이 같은 의미인지를 물었다. 단순히 출생지역을 묻는 질문임에도 여전히 같은 질문일 수 없는 한국사회의 미숙함을 돌아보게 하는 물음이다. ‘너 빨갱이지’와 같은 말은 한국 근현대사의 암울한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예이며, 아직도 한국 사회의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한국의 근대화가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국가, 민족, 경제, 사회, 인권 등 근대성을 나타내는 많은 말들이 대부분 외국에서 빌려온 개념이며, 그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앞서 말한 ‘너 전라도 사람이지’ ‘너 빨갱이지’와 같은 지역, 사상에 의한 차별은 물론이거니와 이찬수 교수의 부당해직 사태와 같은 종교에 의한 차별, 그리고 장애, 성 정체성, 학력, 출신지역(이주노동자)을 근거로 한 차별이 극명하게 존재하는 사회다.

 유태인 대학살과 2차 대전의 참극을 경험한 유럽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교훈을 통해 사회적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홍 위원은 “프랑스에서는 ‘너 유태인이지’ ‘너 노랑(황인종, 유색인종)이지’라는 말은 법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언어로 규정돼 있으며, 그에 따라 처벌을 받기도 한다.”는 예를 들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에 대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생략한 채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만을 수용해 이러한 안전장치를 만들지 못했다. ‘너 전라도 사람이지’와 ‘너 유태인이지’란 말에 대한 문화권의 서로 다른 태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미숙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억압과 차별을 넘어

홍 위원의 강의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다름의 차이를 ‘악’ 또는 ‘틀린 것’으로 규정하는 자기의 주장과 의식을 합리화하는, 20의 인간이 지배하고 80의 인간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자발적 복종’의 사회에 살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홍 위원은 이런 모순된 사회를 극복할 가장 중요한 기제로 ‘공공성’과 ‘똘레랑스’를 강조했다.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공공성이며, 공공성은 ‘똘레랑스’라는 타자 이해와 상호존중의 원칙이 지켜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지켜질 때 다름은 더 이상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나와 타자와의 비교로 우월성을 유지하는 저급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성숙한 자기의식과 성찰이 가능해야 할 것”이라는 홍 위원의 말은 이찬수 교수 문제를 비롯한 우리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실천의식으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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