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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포커스] 남아공 월드컵의 그늘…‘철거민’

http://news.kbs.co.kr/world/2010/05/09/2093463.html#//

소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축제라며 자칭하는 스포츠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내쫓기고 철거민이 되어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보곤 한다.

비단 이번 남아공 월드컵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올림픽, 혹은 월드컵 개최 국가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늘상 벌어져 왔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위상'을 이유로
노점상을 강제철거하고, 노숙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몰아 넣었다.
'국가 명예 훼손 방지'를 위해
좌파, 혹은 노동자들의 시위를 탄압하는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후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오늘 날 우리가 남아공에서 보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들이 반복되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이데올로기 탄압들은
후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국가발전 이데올로기와 함께 더 참혹한 모습으로 벌어져 왔다.

매번 반복되는 이런 모습들을 바라보며 스포츠라는 이름의 

기업, 혹은 국가간의 경쟁을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한다.


그로 인해 직접 고통받는 사람들,
혹은 누군가의 고통을 가리거나,

혹은 누군가를 고통으로 몰아넣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하는데에 사용되곤 하는
 스. 포. 츠’ 를 말이다.




난 축구를 좋아했다.

시골에 살던 어릴적에는 11명씩 팀을 채울 사람이 부족해서
정식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
대충 편 나눠서 기둥 하나 세우고 그 기둥을 맞추면 득점 하는 식이나

하나의 골대를 두고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가며 한다던지
어떤 규칙을 정해 술래가 되는 사람이 골키퍼를 하다가,
다른 사람이 술래가 되면 골키퍼를 교대하는 식의 놀이를 자주 했다.

학교가 끝나면 시작해서 해가 떨어질때까지 쉼없이 공을 찼다.
그 기억은 분명 즐거운 기억들이다.

즐겁게 공을 차다 보면 누가 몇득점을 했는지,
 누가 이긴 것이고, 누가 진것인지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걸 계산할 수도 없게 된다.

그냥 땀범벅이 되서 내일도 또 공을 차러오자고
동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보다 빨리 나와서 운동장을 먼저 차지하자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헤어졌었다.

-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에게는 늘 졌다. 왜들 그렇게 새벽 잠이 없으셨는지...

   노동의 소외를 해소할 스포츠란 분출구가 그 분들에게 무척 소중했기 때문일 것이라 지금은 생각해본다.




누구에게나 이런 '즐거운 놀이' 가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여야한다.

하지만 '프로 스포츠'나 국가간의 '스포츠 경쟁'인 올림픽, 혹은 월드컵, 또는 기타 등등의
국제적 스포츠 경기들은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소위 인류의 축제라는 스포츠에 대다수의 인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노릇을 할 뿐이다.

사실 인류의 대다수도 아니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먹고 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그들이 자칭 '인류의 축제'를 감상할 겨를이 있을 수 있을까?

이처럼 세계의 절반 이상은 배제된 '인류 모두의 축제'를 위해
온갖 고통을 참아내고 초인적인 훈련을 겪어낸 스포츠머신들의 경쟁이 시작된다.

여기다 덧붙여 '현대 (자본주의) 스포츠'의 기원과 발전 이유를 상기해보면
과연 스포츠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와 국가, 혹은 기업과 기업간의

훈련된 스포츠 머신들을 내세운 
대리 전쟁을
인류가 즐거워하며 바라봐야 하는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에 어떤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주요 검색 포털이 다음이다 보니 창을 열어 '2010월드컵'을 검색했을 때 제일 먼저 나온 사이트를 클릭했을 뿐이다.

 -> '인류의 축제' 월드컵은 기업 홍보의 장이 되었다. 사실 그것이 월드컵의 주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첼시>에서 열심히 뛰는 프로 축구 선수들에겐 악감정이 없다. <삼성>한테는 악감정이 아주 많다.

-> 스포츠의 발전은 기업 홍보의 발전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듯 하다. 아니, 무방하다. 삼성은 첼시를 통해 엄청난 기업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현대의 스포츠에 대해 분석적인 글을 쓴
영국 《소셜리스트 워커》의 편집자
크리스 뱀버리의 글을 일부 인용한다.

- 조금은 긴 글이지만, 원문 모두를 올리고 싶을 만큼 공감이 가는 글이다.
   블로그는 글이 조금만 길어져도 창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글을 최대한 줄여보려 노력했지만, 글의 대부분을 그냥 올리게 됐다.




 스포츠, 경쟁 그리고 자본주의

   크리스 뱀버리 <소셜리스트워커> 편집자

/ 이 기사는 <레프트21>과 컨텐츠 제휴를 맺은 ‘다함께’의 기사입니다.
 ⓒ<저항의 촛불> 2호 | 발행 2008-08-18 | 입력 2008-08-14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 위의 기사 제목을 클릭하세요)

 <전략>

  수많은 사람들에게 스포츠는 일상생활의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스포츠는 점점 원자화하는 세계에서 사람들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 ─ 팀일 수도 있고 개인일 수도 있다 ─ 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올림픽은 기업들이 주도하는 행사다.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 기업 후원 금액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두 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세 배다.

  베이징 시 당국은 후원 협정을 맺지 않은 기업들의 광고 활동을 철저히 통제했다. 덕분에 광고판과 야외 광고비용이 27억 달러나 됐다.

  맥도날드는 올림픽 공식 레스토랑이고 코카콜라는 공식 음료다.

  한편 농민공[농민 출신 이주노동자] 1백만 명은 베이징에서 떠나야 했다. 사실 이것은 올림픽에서 늘 있던 일이다. 러시아는 1980년 올림픽 개최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들을 추방했다. 4년 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는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쫓겨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로마[집시]들이 올림픽 경기장 근처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얼마 전 런던과 다른 도시들에서 올림픽 성화 봉송에 맞춰 중국 정부의 티베트 탄압에 항의하는 행동이 있었을 때 “스포츠에서 정치색을 배제하라”는 주문이 있었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는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정치색”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올림픽을 독일 제3제국을 홍보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1968년 멕시코 지배자들은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정치와 연관돼 있다. 스포츠는 오래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인류가 탄생한 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현대 스포츠 같은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급사회 이전에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서로 협동해야 했다. 육체 활동은 노동 과정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현실이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제물 바치기를 포함한 종교 의식, 경쟁 도시 국가들로 구성된 그리스의 특성을 반영한 ‘선수들’ 간 군사적 경쟁 등이 열렸다. 고대 올림픽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스포츠와는 완전히 달랐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수세기 동안 공놀이가 행해졌지만, 그것은 스포츠가 아니라 불교 의식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일종의 군사 훈련으로 라크로스[양 팀 10명씩 하는 하키 비슷한 구기] ‘경기’를 했다.

  이런 행사들과 축구나 럭비 같은 현대 스포츠 경기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

  축구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로 꼽힌다. 축구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대중 경기로 탄생했다.

  작업장의 규칙이 축구장에도 반영됐다. 경기 시간이 명확하게 정해졌고 정교한 시계 덕분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팀에 노동분업이 도입되면서 특정한 포지션과 기술이 생겼다. 승자와 패자의 구분은 더는 애매해서는 안 되고 뚜렷하고 확실하고 절대적이어야 했다. 스포츠에 위계제가 도입됐다.

  경쟁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고 모든 종류의 인간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사랑, 놀이와 모든 사회관계에도 말이다. 스포츠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경쟁 없는 스포츠는 형용 모순이다. 스포츠는 기계, 시계와 인위적 규칙들에 인간 노동이 종속되는 현상을 반영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스포츠는 일등이 되는 것, 상대방을 이기는 것, 새로운 기록을 세워 무조건 다른 이보다 앞서는 것을 뜻하는 활동이 됐다. 훈련은 스포츠판 ‘중노동’이 됐고 갈수록 비인간적인 것이 됐다.

  흔히 스포츠 활동을 하는 남성과 여성은 자유롭고 동등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사고에 따르면 그들은 동등하게 경쟁하고 그 결과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의 주인공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자수성가형’ 남성과 여성이다. 여기에 누구나 열심히 하면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교훈이 뒤따른다. 현실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프로 축구선수가 된 10대들이 반드시 ‘최고’이거나 가장 재능있는 선수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종종 엄격한 규율과 힘든 훈련을 감내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몸을 망가뜨릴 준비가 가장 잘 돼 있는 사람들이다. 운동선수들이 자연적ㆍ육체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면서 약물 사용도 흔한 일이 된다.

  [스포츠에서] 육체 활동은 놀이나 즐거움과는 동떨어진 것이 된다. 올림픽 게임에 ‘놀이’는 없다. 놀기 위해 올림픽에 출전한 사람은 없다. 오로지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 출전한 것이다.

 제국주의

  민족주의는 스포츠의 핵심 요소이며 올림픽에서도 월드컵만큼 기승을 부린다. 사실 스포츠는 제국주의의 도구로 사용돼 왔다.

  트리니다드 마르크스주의자 C L R 제임스는 영국령 서인도에서 크리켓이 식민 통치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서 한 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독일에서 체조가 발달한 것도 청년들을 군사적으로 훈련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의 일부였다. 피에르 쿠베르탱이 현대 올림픽 경기를 고안해 냈는데,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스포츠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스포츠는 삶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소개됐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여겼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현실과 대립되는 ‘여가 시간’이 하는 구실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노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아무런 성취감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시간과 비노동 시간은 날카롭게 그리고 적대적으로 분리된다. 우리는 ‘자유 시간’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자유 시간’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의 ‘자유 시간’은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산물로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편견과 제약에 의해 영향받는다. 스포츠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삶을 통제하고 우리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세계라면 우리는 독서하고, 집을 짓고, 식물을 기르는 것처럼 바다에서 수영하고 산을 등반하는 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육체 활동은 경쟁의 제약에서 해방될 것이다.

  인간해방은 22명이 축구 경기하는 것을 5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것도 모자라 수백만 명이 TV로 시청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이 미친 듯이 경쟁적으로 수영장을 왕복하는 것도 필요없다.

  육체적 휴식과 놀이는 육체적 즐거움, 동료애와 자연 환경을 즐기기 위한 것이 돼야 한다. 스포츠는 그렇지 못하다.

  스포츠는 경쟁이고 독단적인 규칙들에 복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이상적인 준비 과정인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문구는 이것이다.

 [스포츠에서] 육체 활동은 놀이나 즐거움과는 동떨어진 것이 된다.

올림픽 게임에 ‘놀이’는 없다.

놀기 위해 올림픽에 출전한 사람은 없다.

오로지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 출전한 것이다.

Posted by 아프로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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