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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일상 속 이야기/'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

['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①]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기고 글
그녀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①]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11.11.22. 10:25 | 최종 업데이트 11. 11. 22. 17: 16   

박용석




만 18세 이상의 건장한 대학생 청년이 부모에게 사랑하는 이와 독립하여 살겠다는 선언을 하면 어떻게 될까. "군대는? 대학은? 취직은?" 되돌아올 수많은 질문과 욕설에 가까운 꾸지람은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 18세 이상의 여성이 같은 말을 부모에게 했다면…, 상상은 여러분의 몫이다.

자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자. 위의 남녀가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라고 말한다면. 어느 날 27살 대학생인 나와 26살 대학 후배인 그녀 사이에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반쪽도 안 되는 사랑의 권리 

우리는 사랑의 권리는 가졌지만, 그 사랑의 결과에 대해서는 금지당했다. 우리의 섹스는 항상 허공에 사정하는 공허함만을 남기고, 그 공허함만큼 슬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자식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우리를 이렇게 무능하게 만들었을까. 그 책임이 우리의 부모에게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닌데 말이다.

어느 결혼정보회사의 설문에 따르면 결혼을 미루는 이유로 남성은 '경제력'을 여성은 '직장'을 꼽았다고 한다. 사실 두 답변은 말만 바꿨을 뿐 다른 말이 아니다. 돈 때문에 결혼도 미루고 있다는 외롭고 슬픈 이야기다.

나의 대학생활은 2004년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 입학 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학을 다닌 건지 데모를 다닌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임신 사실을 안 건 올해 1월. 2009년 11월,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해 연행되었다 풀려난 후 검찰의 소환영장에 불응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어줍잖은 '수배생활'도 막 마친 상태였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스팩 쌓기와 자기계발에 충실한) 청년들에게도 미뤄야만 하는 결혼과 출산은 나 같은 녀석에겐 너무나도 당연히 허락될 수 없는 권리였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면 취미 활동"

나와 그녀 사이에 아이가 생기기 몇해 전,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저지투쟁 천막농성장에서 수십 일을 보내고 나서 집에 돌아온 후 신장염에 걸려 열이 40도가 넘었다. 응급실 신세를 지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한마디 하셨다.

"네 삶과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하고 다니는 게 다가 아니야. 네 삶 하나 책임지지 못하고 그렇게 하는 건 취미생활이지 운동이 아니야."

아버지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아버지 말처럼 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은 어떡하라고. 자기 삶을 책임지는 것조차 고난인 세상에서, 자기 삶을 책임지는 동시에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아버지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신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 탓이 아니다. 아버지의 상식은 상식이어야 한다. 이 사회에선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는 이 빌어먹을 한국사회다.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 해고당했던 노동자들은 240여 일의 투쟁 끝에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몇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기 제 이름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며 자신의 이름과 학번을 적었던 지지 대자보에 들어간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는 전화였다. 이 자보에는 나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난 그간 그들에게 왜 이름을 지워야하는지 묻지 않았다. 왜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부당한 해고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영원히 취업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란 걸.


평범하지 않은, 그러나 평범해야만 하는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남부끄럽지 않은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았다. 경기도에 7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살고, 아버지 소유의 조그만 상가와 한 가족 먹고살기엔 부족함 없는 쌀과 열매들이 나오는 논밭을 가지고 있는 그런 유복한 삶이었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나는 언제나 부모님에게 한편으론 대견하고, 한편으론 미안하고, 한편으론 걱정되는 자식이었다. 그런 자식이 홀어머니의 외동딸을 임신시켰고, 그래서 결혼을 하겠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심지어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것이 무언지 일생으로 느끼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막장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제격인 상황설정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꼬셔낸 신데렐라 같은 것 말이다.

다행히 막장 드라마는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우리의 결혼을 축복하고 허락해 주셨다. 나는 물론, 나의 부모님 모두 한국 사회의 기준에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인 덕택일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가난'과 '가난한 이들을 양산하는 사회'에 대해 반대하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518 민주화유공자'다. 유신 치하에서 대학을 다니던 부모님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고문의 후유증을 가지고 사신다. 두 분의 첫 만남은 심지어 서대문형무소 앞에 길게 늘어선 즉결심장이었다.

나의 부모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나와 그녀, 그리고 우리 아이의 이야기도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줬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수입을 아버지께 타 쓸 수 있었고, 9월에 태어난 아기의 출산과 육아에 드는 대부분의 비용을 아버지에게 빚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부터다. 언젠가 운동이 취미활동이 되는 것조차 못마땅했던 아버지에게 결혼, 출산, 육아, 그리고 생존까지 전적으로 떠넘긴 나는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선택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죄

 

 

 ▲ 단칸방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박용석  20

'유복한 가정'을 둔 덕분에 결혼과 출산, 육아, 그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었지만 늘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10월 말에 집을 나왔다. '좋은 부모'를 두지 못해 아이와 사랑하는 이를 포기해야만 했을 수많은 이들에게 복에 겨운 소리란 걸 잘 알지만 이 또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적어도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라는 것을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나의 원칙'을 깨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이런 나라도 살아낼 수 있다는 걸.

그간 모아둔 조금의 돈을 가지고 그녀와 우리의 딸과 함께 집을 나왔다. 이제 우리의 선택에 따를 '지극히 당연한' 온갖 수난들과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적어나갈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대자보 속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던 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쫄지 말라"고. 그렇게 함으로서 당연해선 안 될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나의 삶에서부터 바꿔내기 위한 실천이다. 그런 나의 삶이 여러분들을 응원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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