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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일상 속 이야기/'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

['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⑦] 세상을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는 이유 <오마이뉴스> 기고 글


 기고 글


집회 나온 목청 큰 아줌마..."형네 엄마 같은데?"
['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⑦] 세상을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는 이유


2009년, 그해 여름의 기억

태풍이 몰아쳤던 2009년 여름의 어느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 천막에 철야를 자임한 두 명의 학생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학교 당국의 농성장 침탈에 대비해 하루에 두 명씩 돌아가며 철야조를 짜서 천막을 지켰다. 

낮엔 태풍이 오긴 하냐는 듯 맑았지만 밤이 되자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천막이 들썩거릴 만큼 바람도 불었다. 그날 저녁, 천막을 잡고 있는 건지 끌려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학생 중 하나가 나였다. 건장한 구사대를 뚫고 눈물 콧물 쏟아가며 겨우 설치한 천막이었다. '겨우' 천재지변 따위에 허무하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 스크럼을 짜고 막고 있는 구사대. 저들은 용역깡패가 아니다. 학교의 업무를 담당하는 정규직 직원들이다. 2009년 3월, 단지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란 이유로 저들을 뚫고 가야만 했다. 두 시간여 밀고 당기고 나서 힘겹게 천막을 칠 수 있었다. 
ⓒ 박용석   

투쟁 천막에서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학생회관에 있는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방에서 전선을 끌어와야 했다. 끌어온 전선으로 얼기설기 전기가 연결되어 있어 자칫하면 감전될 수도 있었다. 서로 악을 써야 겨우 목소리가 들릴 만큼 비가 퍼붓고 천둥 번개가 치는 속에서 우리는 소리쳐 말했다. 만약 벼락 맞거나 감전되어 죽으면 열사가 될 수 있는 거냐고. 벼락 맞아 죽는 열사는 우리가 처음일 거라며 웃었다.

우린 웃으면서 울었다. 한때 민주화운동의 요람이었던 대학이라지만 현실은 많이 바뀌었다. 우리 같은 것들은 원래 그런 종류인 '별종'이 되어 버려 '순종'들의 관심 밖인 것만 같았다. 혹여 우리가 죽는데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태풍이 지나간 아침에 우린 홀딱 젖어 조금 추웠고 손을 조금 다쳤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분노하는 학생들 권위주의 정권의 군경에 맞아 죽은 학생은 열사란 이름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에 맞아 죽은 학생은 자살이란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들이 나약했다고 꾸짖는다. 더욱이 우리 같은 '별종'들이 죽으면 관심 한번 끌어보기 위한 '쇼'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면

올해 10월 말, 집을 나온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녀와 나는 부랴부랴 부모님 댁으로 돌아왔다. 최근 몇 년간 병원을 전전했던 할아버지의 임종 전에 증손녀를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했다. 할아버지의 상을 지내는 동안 우리의 가출 소식을 들은 친척과 지인들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을 설득했다.

"내가 말해온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말할 수 있나요"란 나의 대답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것을 이해해주셨다. 그리고 더 이상 집을 나가 살아보겠다는 우리를 잡지 않았다.

가난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그것을 죄로 여기는 이 사회는 잘못되었다고. 부유한 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은 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해온 대학생활이었다. 그녀는 가난했고 우리가 그 가난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가 상처를 받아야 했다. 그것을 단지 참아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떳떳할 수 없을 것이었다.


녹록지 않은 삶


▲ 일자리는 있는데 저 자리에 홀로 앉아 오후 9시 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 30분까지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이틀 쉬면 130만 원. 
ⓒ 박용석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때론 버티는 것이 최선의 투쟁일 때도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삶은 쉽지 않았다. 당장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들었고 어렵사리 구한 일자리는 삶을 유지하기엔 부족했다. 어쨌든 이번 학기만 끝나면 될 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그것은 현실을 잊어보기 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의 벌이로는 생계유지조차 버거웠다. 한 달에 이틀밖에 쉬지 못하고 버는 돈이 130만 원이라 학기가 끝나면 한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더 해야 했다. 또는 벌이가 더 나은 일을 구해야 하는데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내게 그런 일자리가 허락될지도 미지수였다. 집을 나오며 가져온 쌀은 점점 바닥이 났고 기저귀 값마저 부담스러워졌다.

선택 예방접종이라는 것들은 맞지 않아도 된다지만 내 인생은 시궁창이어도 아이의 인생엔 비단길을 깔아주고 싶은 게 부모 맘이라 한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선택'이란 이유로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30만 원이나 하는 예방접종도 맞췄다. 앞으로 두 번을 더 맞아야 한다.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어머니가 쥐여주신 비상금마저 바닥이 나고 있었다.

공모전마저 아르바이트가 되어 여러 곳에 글을 보냈지만 수상 발표까지는 기한이 많이 남아 있었고 당선되리란 보장도 없었다. 어디에든 돈을 빌려야 했다. 소식을 들은 그녀의 친구들은 쌀과 먹을 것을 사들고 왔고 얼마의 돈을 빌려주었다.

난 이런 일에서도 완전히 무능력한 존재였다. 대학생활 동안 '친구' 혹은 '형'이라 불렀던 이들 대부분이 총학생회 선거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비판하는 나를 '친구'나 '후배'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내가 한 행동들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어느 총학생회 후보를 비판하는 자보를 붙이고 나서 등록금 인상에 합의했던 후보, 해외 호화 간부 수련회에 다녀 온 후보, 확대운영위원회에 일반 학생 참관을 막았던 후보, 촛불 집회 참가 호소 포스터를 학생들이 보는 눈앞에서 찢어버린 후보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이유로 같은 과 '친구'들이 나에게 보내온 문자다. 
ⓒ 박용석

대학 생활 8년 동안 그리 살아와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두루 챙기지도 못했다. 아무리 허물없이 친했었다 한들 몇 년만에 뜬금없이 연락해 돈을 빌릴 주변머리가 내겐 없었다. 더욱이 최근 한동안은 수배자로 지내 간간이 하던 연락조차 하지 않아 전화번호가 그대로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 '4만 원'의 힘

결국 그날의 동지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246일간의 투쟁의 성과로 2011년 10월에 복직하게 된 대학노조 명지대지부 조합원들 말이다. 복직을 했으니 어느 정도 벌이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들에게만큼은 '고마운 학생'이니 돈을 빌려달란 말을 꺼내기도 쉬울 것 같았다.

가장 친분이 있던 조합원 한 명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246일간의 투쟁을 했고 합의 후에도 1년간의 휴직을 해야 했던 삶의 고난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복직은 했지만 지난 상처들로 인한 생활고가 아직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기 너머로 연신 미안해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고 '고마운 학생'의 지위로 그들을 괴롭히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집을 나온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갈 때쯤,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월급날까지는 일 주일 정도 남아 있었고 내 수중엔 몇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그날은 대학노조 명지대지부 창립 3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 기저귀 값 하루에 많게는 20여개씩 쓰는 기저귀 값도 만만치 않다. 60개들이 한 팩이 3만 원 가량. 일주일이면 6만 원이 넘고 한달이면 30만 원이다. 
ⓒ 박용석 

기저귀가 얼마 안 남았다며 울상인 그녀에게 "오늘은 어떻게든 돈 빌려볼게"라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서울에서 수업이 끝나고 부랴부랴 행사가 진행될 용인으로 갔다. 기념식엔 늦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뒤풀이 자리에 겨우 도착했다. 하지만 차마 돈을 빌려달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야만 하는 나와 그래선 안 된다고 하는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나처럼 246일간의 투쟁에 함께했던 '고마운 학생'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상처받더라도 참고 지내라고 하는 것과 집을 나와 이렇게 고생 시키는 것 중에 어떤 게 그녀를 더 힘들게 하는 걸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4명밖에 모이지 못한 그들은 만 원씩을 꺼냈다. 내 선택을 응원해주는 4만 원이 손에 쥐어졌다. 그들의 현재와 미래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고 고난의 연속이란 것을 잘 안다. 지갑에 만 원도 들어있지 않은 때가 더욱 많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때문에 단지 4만 원이었지만 세상을 조금은 더 버텨낼 수 있을 힘을 얻었다.


2009년, 그해 여름의 또 다른 기억

막심 고리키(Maxim Gorky)가 쓴 <어머니>란 소설이 있다. 노동 투사인 아들의 투옥되고 결국 죽음을 맞는 과정을 지켜 본 어머니도 투사가 되어가는 내용이다. 그 소설엔 아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처음 목도한 어머니가 군경의 총검 앞에 뿔뿔이 흩어진 군중들 앞에서 외치는 감동적인 대목이 있다.

2009년 6월 9일, 그날도 비가 억수로 쏟아졌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및 민주회복 문화제'의 전야제 격인 집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수일간 이어진 집회에다 천막농성을 하느라 몸살에 걸려 있었고 그 집회엔 참석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천막이 아닌 집에서 쉬고 있는 내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지금 자유발언하는 아줌마, 형네 엄마인 것 같은데?"

고려대학교 76학번이라 자신을 소개한 목청 큰 아줌마가 발언을 했다고 한다. 2008년 6월, 시청 앞의 천막농성장을 강제 철거하던 날 막내아들이 연행됐다고 했다 한다. 우리 어머니였다. 전화기 너머로 유독 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민주화를 이룬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들들을 위해 다시 싸워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 아들들이 끌려가게 할 수 없습니다."


 ▲ 할머니와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할머니. 그리고 체 게바라의 품에 안긴 아기. 
ⓒ 박용석 


나의 어머니가 그런 어머니여서 감사하다. 내 삶과 글이 그런 어머니들이 좀 더 많아지게 하는데 조금이나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들, 그런 아버지, 그런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은 버텨내는 것만도 벅차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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