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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살맛나는사회/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

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년 1- 한 소띠 청년(85년생)이 바라본, 이명박 정부 출범에서 촛불운동까지


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년. 첫번째 이야기.
- 한 소띠(85년생) 청년이 바라본,
   이명박 정부 출범에서 촛불운동까지

[프레시안] 
'2009 명박대첩', 의지의 낙관과 '신발'로 무장하자
[손호철 칼럼]<1> 파시즘의 시대, 우리 '민중'이 변치 않는 희망 中
 사족: 참, 올해를 버텨내려면 모두들 가벼운 신발, 아니 실내화를 한 켤레 씩 준비하자. 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자회견에 나가 신발을 못 던지더라도 그가 나오는 뉴스를 보며 텔레비전을 부서뜨리지 않을 만큼 가볍고 부드러운 실내화를 텔레비전을 향해 던져야 정신건강을 유지하며 한해를 살아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때로는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투쟁일 때도 있는 법이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보통 새해가 오면 다이어리를 선물하곤 한다.

올해부터는 사랑하는 이의 정신건강<?>을 위해
실내화를 선물하는 문화가 약 4년간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4년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제야의 종 타종행사에 외쳤던 그 외침처럼 말이다.

쉴 틈이 없었던 한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려도
불확실한 미래의 절망을 양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한 해다.
미래에 대한 절망과 그에 못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이 분출했던 2008년.
한 소띠 청년(85년생)의 2008년 한해를 정리해보려 한다.

꽤 스펙터클한 역사의 한복판을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스펙터클한 호러 액션 영화 같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때로는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극이기도 하다.

85년생의 첫 선거는 2005년 5월 31일, 지방선거였다.

'5.31 지방선거', 20대의 보수화 태제가 본격적으로 판을 치기 시작한 시기다.
20대들은 다수가 투표하지 않았고, 기성 정치에는 무관심한 듯 보였다. 이런 상황에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 한나라당 지지율이 20대가 보수화 되었다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을 한목 거들었다.

나와 나의 친구들, 그리고 대다수의 20대는 어느새 '보수화된 아이들'이 되었다. 

 한나라당, 20대 보수화 경향에 ‘자신감’
 (2005년 5월 17일 연합뉴스 기사 中 발췌)
 
 
 젊은층의 지지율 제고를 놓고 골머리를 앓아온 한나라당이 요즘 20대는 `386세대'와는 달리 보수화 경향을 보인다는 분석이 잇따라 제기되자 반색하며 20대 공략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김무성 사무총장은 17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최근 한국대학신문이 작년10월 대학생 2천9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 "대학생들의 보수화 성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략>

그리고 2007년 12월 대선이 시작되었다.
'보수화된 아이들'이란 꼬리표가 이내 못마땅 했던 나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하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서 그 후보를 당선시키도록 하겠다는 포부에 가득찼다. 그리고 20대가 보수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나의 보수화 되지 않은 자아정체성을 증명받지 않으면 마치 육체와 정신이 분열하여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은 심정으로 열정을 바쳐 선거에 임했다. 그리고 그렇게 2008년은 다가왔다.

나의 열정과 역사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MB정권이 시작되었다. 압도적인 표차였다.하지만 패배감은 없었다. 그동안 타자화 되어서 바라 보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나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2008년은 시작했다.

2008년의 시작은 대선결과에 대한 암담한 평가와 패배감에 빠진 이들의 절망과 치열하게 맞서 싸워야 하는 시기였다. 나의 주변 친구들은 물론 함께 했던 이들 중에 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이야기 했다. 절망이 다가올 것이라 했다. 이제는 '진보'를 버리고 '감성'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은 치열한 대선 평가 논쟁을 겪어야 했다. 90년대의 논쟁이(어쩌면 그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2000년에도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나 역시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당은 둘로 나뉘었다.

물론 당시의 논쟁은 필요한 것 이었다 생각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 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표면화 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옳지 않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논쟁 속에서 가장 지지하는 입장을 내는 당내 의견조직에 이끌렸다. 

            

 다함께 성명서- 민주노동당 분당을 반대한다.

                  
이 날 이후로 나의 대학생활 동안 투쟁의 현장을 누비며 동지라 부르던 몇명의 친구들과 대면대면한 사이가 되었다.  2월 5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몇명의 친구를 심지어 잃게 되더라도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아직까지 배반당하지 않았다.

2008,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20대를 절망의 세대라고들 했다. 2007년, 20대의 베스트 셀러이자 화두는 단연 '88만원세대'였다. 실업과 비정규직을 오락가락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절망이었다.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보수화된 대학생'이란 꼬리표를 친절히 붙여준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2006년, 그리고 2007년. 나의 대학생활의 경험들은 그것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대안'이란 단어에 목말라하는 20대를 목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2008년 이전부터 꿈틀대며 '보수화' 꼬리표를 거부한 대학생-청년들의 행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20대는 2002년 효순·미선 압사 항의 행동의 주된 참가자였다 <자료출처> [다함께] 발행 주간지 '맞불' 83호 기사 中


미군의 효순, 미선양 살해 사건으로 촉발된 촛불이나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당시의 노무현은 아직 신자유주의화를 밀어붙이기 전으로 대중의 개혁 열망을 받아 않고 당선된 개혁의 상징이었다)과 같은 거대한 운동에서 뿐 아니라 나의 단편적 기억에서도 이것은 '참'이었다.


무언가 급조 되고, 무언가 부족한 듯 시작했던 2007년의 기억. '대학생 대안언론 연합캠프', '대안언론미디어포럼'에 참가한 대학생들의 목마름을 보았다. '대안'이란 단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는 적절한 단어였다.

'보다 나은 것'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젊음들은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애타게 부르짖은 민주주의와는 또 다른 2000년대의 부르짖음이었다.

성공적인 캠프와 포럼의 개최는 당시 캠프를 주최했던 나와 형, 동생, 누나, 친구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내친김에 '대학언론연대'라는 새로운 연대를 구성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상업화된 대학 매체들에 맞짱뜰 새로운 대학언론을 만들어보자는 데까지 나아갔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고,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자신의 젊음 바쳐서 맨땅에 해딩 한번 해보자", "계란으로 바위치면 계란 흔적이 남는다"는 무대뽀 정신의 젊은 청춘들이 모였 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들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 했던 이유는 바로 촛불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그리고 갈구하던 그 '대안'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고 그 운동에 투신하기에도 빠듯하여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즐거운 비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명박 '삽질 정부'의 시작

 ◁ 이명박 삽질 정부의 출범은 말 그대로 절망과 분노의 시작이었다. <자료출처> [다함께] 발행 주간지 '맞불' 80호 기사 中

이제 본격적으로 이명박 삽질 시대의 시작, 2008년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다들 우려하던 일들이 점차 그 윤곽을 분명히 하며 현실이 된 바로 그 해의 일 말이다.

'반값 등록금 공략'을 이행하라는 기자회견을 하던 대학생 교육대책위의 학생 30여명이 인수위 사무실 앞에서 연행되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에는 이명박이 당선되던 날 새벽 용역깡패들이 찾아왔고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강부자, 고소영' 내각출범이 이 정부의 끔찍한 시작을 알렸다.

이것은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의 서막이었다. 

'왼쪽 깜빢이를 켜고 우회전' 하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 대한 반사이익 덕분에 이 정권은 총선에서도 다수 의석을 확보하며 자칭 '개혁 드라이브(공기업 사유화, 국민연금 개악, 비정규직 확대 양산, 공교육 상업화, 부유세 폐지, 한-미FTA 비준 등)'를 강행할 토대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사이비 진보' 노무현의 반사이익으로 권력을 거저주은 이명박.
그의 득표율은 사상 최고였으나, 그의 지지도(투표율 대비 득표율=약 20%)는 사상 최저였다.
연이어 치러진 2008년 총선 결과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좌> 2007년 대선 대선 개표 방송 <우>2005년 한-미 FTA 반대 시위에서 파손된 경찰차량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차선을 넘나들며 역주행 하는 불도저' 정권을 출범시키고 이들이 원내 다수를 차지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 토대가 '분노'와 '실망'에 기반해 있었기에 매우 불안정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노와 실망을 감싸안아 그 고통을 달래주거나, 아니면 그들을 더욱 강력하게 짓밟아야 했다. 물론 그는 우려대로 후자를 선택했고 대중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미친소

 △광우병으로 뇌에 구멍이 뚫린 소와 구멍 뚫린 미국의 검역 시스템을 풍자한 만평-  국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는 미친 정부의 미친소 수입은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도록 만들수 밖에 없었다.
<자료출처> '맞불 86호' 우석균 칼럼-누가 괴담을 퍼뜨리는가? 

대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애초에 국민들은 이 정부를 신뢰하지도 않았거니와(투표율과 득표율을 환산하면, 50%라는 사상최고 득표율과는 별개로 사상최저 국민 지지를 받았음) 그가 벌이고 있는 행태는 눈 뜨고 보아주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폭발했다.

 [5월 2일 첫 촛불 집회]- 청소년들에게는 이명박은 심지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었다. <자료출처> [다함께] 사진자료실 

5월 2일, 그간 응축된 분노가 청계광장에 모였다. 이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고 소외받는 이들 중 하나. 청소년들이 그 날의 핵심이었다.

그 날, 압도적인 구호는 "우리는 살고 싶어요"였다. 청소년들은 분노했다. 자신이 선출하지 않은 지도자가 자신의 미래와 생명을 위협한다는 사실에 말이다. 이 분노는 단지 청소년들만의 외침은 아니었다.

 [5월 1일] 118주년 세계노동자의날. 이날 노동자-청년들은 이미 촛불항쟁에서 제기된 전반의의 요구들을 내걸고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남은 1명의 수배자.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김광일(다함께운영위원)행진팀장은 이날도 활력있는 거리행진을 주도했다.
<자료출처> [다함께] 사진 자료실 

이명박에 맞선 대중들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청계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물론 운동의 확대 과정에서 정당과 사회단체의 참가, 행진의 가부 등에 대한 이견들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대중의 분노는 청계광장이란 공간을 넘쳐서 폭발하고 있었다.   

촛불 항쟁

 ▲ 6.10 항쟁 기념일인 지난해 6월 10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일대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전면 재협상을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자료출처> 남소연 (OhMyNews)


청계광장을 넘어선 집회 참가자들. 그것은 누군가가 치밀하게 계획지었던 것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청계광장이란 협소한 공간이 넘쳐나는 대중들을 수용하기에는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리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논쟁은 시작되었다. 행진을 해야하느냐 아니냐, 논쟁은 소모적이었다. 이미 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고 있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들과 함께 할 것이냐, 아니냐였다.

 ◁ "귀 막은 정부에 국민의 뜻 알리고 싶었을 뿐"인 평범한 사람들이
5월 26일 신촌 인근의 연세대학교 앞에서 대거 연행되었다. 이 날은 촛불항쟁 중에서도 최악의 경찰 폭력사태로 꼽힌다.
<자료출처> 한겨레 신문 웹 사이트

5월 26일, 신촌까지 행진한 집회참가자들 중 일부가 연세대 앞에서 미리 포위망을 치고있던 전투경찰에게 토끼몰이 당하듯 연행되었다. 이 장면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파되었다. 이미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대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배후설 운운하며, 촛불이 분열하기만을 바라던 정부와 조중동 찌라시의 바램과는 달리 [다함께] , [한국진보연대] 등 단체들에 대한 마녀사냥은 더이상 설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거리로 넘쳐나는 대중들의 염원을 지키기 위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내에서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행진에 나선 단체들이었기 때문이다. 6월 10일, 100만의 촛불 대항쟁의 시작된다. 이명박 정부는 이미 권위주의 독재정부로서의 모습을 톡톡히 보여주었고, 이미 촛불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재세력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신자유주란 이름의 재벌천국에 대한 민중들의 정당한 반대운동이었다.

분기점
촛불이 성장하며, 여러차례 분기점이 있었다. 나의 경우 총 5번의 결정적 분기점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1. 정당, 사회단체 배제 논쟁
(정당과 사회단체의 참가로 촛불의 순수성의 훼손된다는 논리)

2. 청계광장을 넘어선 행진 여부에 대한 논쟁
(행진은 위험성이 크며, 이는 일부 급진단체의 주장일 뿐이라는 논리)

3. 일부 급진단체 배제 논쟁
(일부 급진단체가 촛불을 주도하려 하며, 이들을 배제하지 않으면 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논리)

4. 폭력, 비폭력 논쟁
(경찰의 폭력에 항거하지 않는 방식으로 '절대적 비폭력'만이 운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

5. 정권 퇴진 운동 경고 시한 이후 전략 논쟁
(정권퇴진 운동은 불가하며 의회로 이 운동이 수렴되어야 한다는 논리)


운동은 그간의 여러 논쟁들을 극복해가며,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마지막 논쟁. 정권퇴진 불사 논쟁에서 이 운동은 소강기를 맞이하였다. 6월 20일까지 최종 협상 시한을 못박았음에도 오히려 그 시한 이후 운동의 발목을 잡으며 운동이 더욱 전진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맞불> 92호<2008-06-19>
이렇게 생각한다 ─ 촛불은 어디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왜 퇴진 운동이어야 하는가?

촛불 운동 내의 가장 뜨거운 논란은 이명박 정권 퇴진 요구 제출 여부다. 국민대책회의는 1백만 명 시위 직후 “정부가 20일까지 재협상 방침을 밝히지 않으면 정권 퇴진 운동도 불사하겠다”고 밝혀 놓은 상태다.

이명박 정부는 20일까지 재협상 방침을 밝히지 않을 게 뻔하다. 김종훈 보따리를 풀어놓으며 또다시 국민 기만을 시도할 것이다. 이 점이 명확한데도, 안타깝게도 국민대책회의는 정부에게 제시한 시한 종료 이후 정권 퇴진 운동을 선언할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국민대책회의 소속 단체 가운데 다함께, 보건의료단체연합,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노동전선, 한국작가회의(송경동 시인) 등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 시민ㆍ사회단체들 상당수가 정권 퇴진 운동을 부담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정권 퇴진 운동에 대해 의견을 모으기로 한 국민대토론회의 일정마저 19일부터 27일까지 늘려 잡았다. 이명박은 일주일의 말미를 보너스로 더 얻은 셈이다.

맥 풀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들 사이의 싸움에서도 언제까지 두고 보자고 했으면 그 뒤에는 상응하는 조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우리를 우습게 보며 자신감을 얻어 역습의 기회를 노릴 것이고, 우리 편은 기가 꺾일 것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이명박과 한나라당에게 반격의 기회를 내주었다. 지난 촛불운동 내내 운동의 수렴점이었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대한 불신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고, 앞서 진행된 모든 논쟁점들이 다시금 표출되기 시작했다.

'의회주의 온건 개혁세력'들은 운동의 분기점을 그렇게 정체 시켰다. 정체된 운동은 점차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반격의 여지를 내어주게 되었고 수배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렴구를 찾지 못한 운동은 치열한 논쟁점을 남긴채 점차 수그러 들었다. ('온건 개혁세력', '의회주의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들은 당시의 치열했던 투쟁에 함께 나선 소중한 동지들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시의 전략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생각한다)

그러나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촛불이 꺼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촛불은 타오르고 있다. 이에 대한 나의 주장과 이야기들을 다음 연재로 담아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