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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년. 네번째 이야기
-한 소띠(85년생) 청년이 바라본,
  MB정권의 막가파식 독재의 심화와 저항의 확장


영화 Sicko 中

빚을 진 사람은 희망을 잃고
절망한 사람은 투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온 국민이 투표할 거라고 말합니다.

만약 영국이나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후보들에게 표를 던지면
민주주의 투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런 일이 없도록
국민들이 계속 절망하고 개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지요.

그들이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공포를 주는 것이고,
둘째는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육받고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국민은 휘어잡기가 어렵습니다.

-토니 벤(Tony Benn)영국 노동당 전 당수


이명박과 그의 하수인들이 의회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으므로, 그들을 독재라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해서 이번 연재의 시작은 매우 논쟁적인 이야기. 바로 의회제는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부터 풀어나가려 한다.

의회제와 독재는 양립할 수 없다?

 영화의 한 장면? 아니다. 불과 20여년 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한민국의 탱크와 군인들은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이렇게... 살육했다.
이분들이 살아계셨더라면, 나와 비슷한 나이의 자식을 둔 부모들일 것이다.
실제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시의 끔찍한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들이다.



아래의 블로그에는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을 생생히 전하는 사진들이 담겨 있다.
다만 한가지.
끔찍한 사진들을 보며,
그냥 고개를 돌리기보다 그 역사의 아픔 속에 산화해 간 열사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너무나 끔찍한 참상은 당신의 현실감각을 한동안 마비시킬지도 모르겠다.

<자료출처> 518/ 광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 5.18 / http://blog.paran.com/518

의회를 통한 대의민주주의와 선거는 분명 어마어마한 대중의 투쟁으로 어렵사리 획득한 민주주의의 꽃이다. 봉건제를 타파한 부르주아 혁명(프랑스 혁명, 영국 형명) 이후에도 노동자(이전에는 농노)와 여성에게까지 평등한 선거권은 100여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투쟁을 통해 겨우 획득된다. 대한민국 역시 끔찍한 군부의 독재를 타파하는데에 너무나 큰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렇게 어렵사리 쟁취한 의회제 민주주의가 애초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평생 20번의 투표를 한다면(실상 이것보다 적게 투표한다), 그는 평생 동안 단지 20분만 민주주의의 주인이다. 그들은 그들이 선출한 대표자를 통제할 그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한다. 그들이 그들의 지배자를 통제하기 위해 거리 시위에 나선다면, 그들은 무자비한 경찰의 폭력이나 더욱 심한 경우 총과 장갑차를 동원한 군대와 직면 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투표를 통해 권리를 행사하는 그 20분의 시간마저 민주적이지 않다. 서민(노동자)들이 획득하는 정보는 대게 매우 제한적이며, 그들의 이익과 완전히 배치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생각해보자. 대형 방송사들은 모두 재벌들의 소유거나 그들이 제공하는 광고가 주 수입원이다. 그들은 애초에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위한 올바른 정보를 재공 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의회의 대표가 완전히 민주적으로 선출된다 한들, 그것 역시 완전한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없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기업주를 막을 권한이 전혀 없다.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럴 의지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은 기업주들의 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을 짓누르며 전혀 엉뚱한 쟁점으로 대중의 관심을 몰고 간다.(전쟁과 범죄와 같은)

 △ 2005년 12월 자이툰 부대를 방문한 전경련 대표단 -
이 사진은 5년이란 파병기간 동안 7260억원이란 국민들의 혈세를 탕진해가며, 청년들을 사지로 내 몬 전쟁몰이.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다.
<자료출처> '맞불' 14호 '이라크에 가는 전경련 - 피비린내 나는 기업 이윤 추구' 기사 中

때때로 의회가 국민 다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은 아래로부터 분출한 대중의 운동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우를 ‘국가기관의 상대적 중립성’이라 하기도 한다. 일부 의회주의자들은 대중의 운동은 전혀 보지 않은 채 이와 같은 의회에서의 결과만을 보고 의회가 민주적이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같은 때에도 의회는 대중의 요구를 완전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과의 타협점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친다.

의회에는 애초에 두가지 압력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청난 재산과 어마어마한 이윤을 창출하는 대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의 압력과 신발 두 짝과 자신의 몸(노동력)을 팔아서 하루하루를 이어가야 하는 노동자들의 압력이다. 의회는 누구의 말을 듣게 될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공격하는 자본가들에게 맞서 투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투쟁이 승리하거나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의회는 절대로 민주적이지 않을 것이다.

헌법의 기본권-집회와 시위의 자유
의회제 민주제는 애초에 완전할 수 없기에 그것을 보완할 대중(노동자)의 정당한 저항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이것이 보장되어 있다. 대중의 정당한 저항의 핵심인 노동자들의 파업과 노동쟁의 행위 또한 인정되어 있다. 이것이 애초에 보장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권리가 쟁취된 것은 채 2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헌법이라 불리는 헌법개정을 통해 쟁취한 민주적 권리다. 그러나 대한민국 역사에서 단 한번도 이와 같은 헌법의 조항들은 저절로 보장된 적이 없다.

 

 박종철 열사와 87년 노동자 대 투쟁-
군부를 몰아내고 '민주헌법'을 쟁취한 대한민국 민주화의 새 역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독재는 계속되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있다면, 애초에 촛불항쟁은 완전한 합법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법이라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한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파업에 나서면 ‘불법파업’이라며 난리다. 헌법 역시, 민주주의를 담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헌법에 아무리 명문의 조항이 있다 한들 그것을 집행하는 자들에게도 의회와 똑같은 압력이 존재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 했던가” 사법의 정의를 철통같이 믿고 법을 따르기 위해 법을 배우고자 하는 법학도들에게는 다소 미안한 발언이지만, 법이란 게 원래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80%는 절도다. 그리고 이 절도의 50%이상이 200만원 이하의 경미한 '단순절도'다. 이들은 대부분 1년 이하의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사법의 정의가 구현되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제 이 법을 똑같이 자본가(재벌)들에게 적용해 보자.
400억(밝혀진 혐의로만)원을 아들과 함께 사이좋게 나눠먹은 삼성의 회장 이건희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아들이 술취해 싸움이 나자 아들과 시비가 붙은 상대방을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폭행한 한화의 회장 김승연은 특별 사면되었다. 심지어 수감되기도 전이었다. 법은 매우 정의롭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죄를 지었는가? 
 













비리 재벌들 왼쪽부터 삼성 이건희, 두산 김용성, 한화 김승연


















왼쪽부터 삼성 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 이주노조 까지만 위원장, 라주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
 
진짜 범죄자들은 사면되거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당한 노동쟁의를 한 노동자들은 범죄자가 아님에도 구속되거나 강제 출국당해야 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사법정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

아래로부터의 저항

사회가 민주적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법질서’와 ‘의회제’가 아니라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다. 그것은 이 사회가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체제’이기 때문이다. 흡혈귀 같은 자본주의는 끝없이 노동자들의 피를 요구한다. 신자유주의는 이제는 더 이상 내어줄 피가 없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피를 내놓으라며 뼈와 가죽마저 뜯어먹는 자본주의란 이름의 흡혈귀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본질적 물음 하나에 도착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원래 끝없는 쟁투(자본가-노동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바로 이부분에서 두 가지의 논점이 있다.

‘자본주의란 체제를 유지하며 쟁투를 노동자들에게 이롭게 잘 조절하면 된다’

(어느 정도의 피만 수혈해 주며 흡혈귀가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잘 달래면 모두에게 이롭다)

‘자본주의란 체제가 애초에 잘못된 것이므로 이 쟁투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흡혈귀를 달래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들을 몰아내고 거기에 인간들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전자를 개혁주의(개량주의)라 부르고, 후자를 사회주의라 부른다.

‘국가보안법’이 살아 숨쉬고, 어려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를 착실히 주입받은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을 테지만, ‘후자의 입장’ 그 자체(행위가 아니라 입장)에 대한 물리적 탄압을 허용하는 정부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몇 독재정부들밖에 없다. 심지어 전자의 입장에 대해서까지 물리적 탄압을 하게 되는 경우, 그 정부는 그 어떤 면에서도 독재 정부라 부를 수밖에 없다.

 이명박의 취임식에 나란히 서있는 두 전직 대통령과 학살자. <자료출처> 오마이뉴스 

바로 이명박 하의 대한민국이 그렇다. 그리고 사실,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도 이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국민들을 총으로 위협하고 심지어 살육한 범죄자들이니 말이다.
광주의 망월동 구묘역에는 학살자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보여주는 곳이 있다.
합천에 방문한 전두환 내외를 환영한다는 비석이 쪼개어져 광주 망월동 구묘역의 입구의 바닥에 깔려 있다. 
아직 민주화 되지 못한 대한민국 민중들의 한을 보여준다.   

이곳에 묻혀야 할 이는 광주의 '청년-학생-노동자들'이 아니었다.
80년대 군부독재의 지배자이자 학살자인 전두환과 그의 졸개들이다.
벼락맞아 죽어도 모자랄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앞서의 물음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법이 정의롭다고? 법은 살인은 물론, 학살을 저지른 이들을 온전히 처벌하지 않았다. 결론으로 나아가자면 대한민국은 아직 권위주의 독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단편적으로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현존이며,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화하며 찬양하는 이상한 나라의 정부와 전두환이라는 학살자가 전직 대통령 대우를 받는 현실이다.

이들을 누가 처벌할 수 있을까? 이들을 처벌하기는커녕 고무-찬양하는 이들이 우리의 권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을 수 있는지 말이다. 이제 답은 분명하다.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내고 획득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필요하다.

아직도 MB정권을 독재정부라 부르기 주저하는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기나긴 군부독재의 아픔을 겪었다. 그를 극복해 가는 저항의 역사를 써오며, 아직 그 문화와 역사를 간직 해 오고 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을 휘두르는 권위주의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독재 하에서도 여느 나라에 뒤쳐지지 않는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현존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투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노동자 투쟁이 미약한 미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심지어 존경한다고 한다.
 





















<좌> 마석 모란공원의 전태일 열사 흉상
<우> 매년 11월 전태일 열사 추모기간에 맞춰 개최되는 전국노동자대회
<사진출처>
<좌> 좌파사진작가들의모임 싸이월드 클럽
<우> 다함께 사진 자료실

다만 그래서인지. 때때로 군사를 동원한 물리적 탄압만을 독재의 상징으로 여기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다. 그들은 노무현-김대중 정권은 민주정부였다고 말한다. 한 술 더 떠서는 이명박 정권을 독재라 부르는 것을 주저한다. 그러나 민주정부라 불린 이들 두 정부 하에서도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물리적 탄압이 존재 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0년 수배 끝에 경찰에 연행된 윤기진(35)씨의 부인 황선(36)씨가 두 딸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제공
<자료출처 및 캡션> 한겨레 신문

국가보안법이란 구시대의 유물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 임기 말 명지대학교를 졸업한 선배(필자는 명지대학교에 재학 중이다)인 범청학련 남측본부 윤기진 위원장을 비롯한 200여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생각해보자. 꿈을 꿀 자유가 없는 나라가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말이다.

법이란 것이 행위의 잘못을 가릴 수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단순히 존재함을 처벌할 수는 없다. 행위의 잘못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는 나라가 있다. 이명박의 경우 심지어 다수의 사람들이 ‘독재의 상징’ 이라 여기는 경찰병력(‘군사’까지는 아니지만) 수만을 동원해 상시로 국민들을 폭력으로 위협했다.

20년을 되돌리겠다는 MB

금성 출판사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일선 중·고교에 배포한 책 <건국 60년, 위대한 국민-새로운 꿈>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과 경제발전 등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의 치적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한국 현대사의 큰 상처인 1948년 ‘제주 4·3 사건’이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서술은 한 문장으로 축소했다.

온통 민족주의 사관으로 가득차 있는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며, 역사교과서를 '친일-친미-친독재'로 가득 찬 권위주위적 사관으로 수놓으려는 뉴라이트.
 
역사는 진정 거꾸로 흐르고 있는가보다.

<자료출처> 한겨레 신문

그의 정책 그 어느 것 하나도 민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이에 분노한 대중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자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러 댔다. 그의 ‘재벌 프렌들리’를 확고히 하기 위한 퍼주기에 제동을 거는 이전의 모든 법들을 고치겠다고 한다. 대중들의 저항을 보다 효과적으로 짓밟고 이들이 애초에 분개하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입조차 틀어막겠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서 이와 같은 삽질을 보며 ‘못해 먹은 10년을 위해 20년을 되돌리는 정부’라 표현하곤 했다. 나는 이 표현이 일정부분 맞지만 일정부분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의 개혁에 대한 염원으로 그와 그의 정당(한나라당)이 지지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못해먹은 10년’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무현-김대중 정권 하에서도 그가 그토록 위하는 재벌들은 여전히 해먹었다. 이점에서는 ‘못해먹은 10년’은 사실이 아니다.

이 표현에서 모로 보나 ‘참’인 것은 ‘20년을 되돌리겠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독재를 심화시키며, ‘고통분담’이란 고통전가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해 박정희 시절의 ‘개발독재’에 준하는 잔인한 노동착취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국민들의 눈과 귀, 심지어 입을 틀어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전방위적 탄압을 강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광주의 학살자’와도 매우 닮은꼴이다. 이명박은 20년은 족히 되돌려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충성스런 지지자(동시에 지배자)인 '강부자-재벌'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
경제위기 시기의 노동자 투쟁

 △ 경제 위기 하에서는 작은 개혁을 얻기 위한 투쟁도 거대한 투쟁으로 분출할 수 있다
<자료출처> 저항의 촛불 4호 '987년 6월항쟁과 2008년 촛불항쟁, 무엇이 달라졌나'기사 中

분노한 대중들이 항상 저절로 투쟁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고통, 양자의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 경제위기 시기에는 이와 같은 양 극단의 결과 중 어느 하나를 맞이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때문에 분노가 크더라도 투쟁에 나설 자신감이 부족할 가능성도 높다. 한국이란 조그만 나라의 대중 투쟁만을 보자면 촛불의 소강기 이후 절망에 빠진 이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꺼지지 않고 MB정권에 맞서 곳곳에서 분출하는 저항들이 올바르게 서로 연대할 수 있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 전망한다.

지난 촛불의 경험으로, 이제는 촛불이 단순히 먹을거리 문제였다는 협소한 잘못된 관점은 그 어떤 면에서도 지지 받기 힘들다. 현재 타오르고 있는 촛불은 경제위기를 전가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이며, 대중의 정당한 저항(촛불)을 짓밟는 정부에 대한 민주화 투쟁이다.

곳곳에 산개하여 타오르고 있는 촛불들이 결합 지점을 만들며 하나의 거대한 대중운동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이전의 논쟁들을 단박에 뛰어넘은 새로운 운동으로 분출할 것이다.

 2009년 우리의 소망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외쳤던 새해 첫날   <자료출처> 다함께 사진 자료실

수만의 대중이 보신각 앞에서 우리의 소망,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외쳤던’ 2009년의 시작을 보면 이 촛불들이 하나의 거대한 저항을 만들어 낼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를 위한 분기점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다만 나는 그것이 시기의 문제일 뿐,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전망한다. 시작부터 지겨웠던 한 대통령의 임기를 몇 년으로 단축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있을 뿐이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항들이 절망적 패배를 당하지 않도록 이들을 방어함과 동시에 이들이 서로 연계될 수 있도록 할 ‘조직’과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보다 나은 세상’은 바로 우리의 미래,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한여름 거리를 수놓은 불꽃들이 갈구하던 ‘대안’이 바로 그것이다.  

고통전가의 정치경제 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전쟁과 신자유주의와 맞선 국제 노동자 투쟁

자본주의란 세계체제는 한나라에서만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이 체제의 옹호자들은 매우 일관되게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심지어 전쟁이라는 학살과 파괴를 통해서 말이다.

<블로거의 이전 글>

그리스 민중에게 연대를1- 그들과 우리는 너무나 닮아 있다. (12월 18일 그리스 민중 투쟁 연대 기자회견 참가 후)

그리스 민중에게 연대를2- 12월 18일 그리스 민중 투쟁 연대 기자회견 참가 후기 


이에 맞서는 저항 역시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세계로 전파되어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을 고무할 것이다. 한국의 촛불 운동 역시 그 중 일부였다. 지금은 한국이란 조그만 나라의 저항이 잠시 주춤한 것 같지만, 저항은 다른 곳에서도 분출하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과 영국, 일본에서도 말이다. 또한 전쟁과 학살에 맞서 중동의 저항이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마지막 연재에서 이들의 투쟁과 한국의 투쟁이 왜 필연적으로 서로를 고무하게 되고 연계될 수밖에 없는지, 왜 그와 같은 연계가 운동의 확대와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다루고자 한다.    

   

Posted by 아프로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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