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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살맛나는사회

2008년, 88만원 세대의 추석 풍경

  [ 2008년, 88만원 세대의 추석 풍경]


논두렁, 밭두렁, 뒷산을 누비며 탐험대 놀이를 하며,

대장을 따르는 탐험대원 사촌동생들에게 떫은 도토리를 먹이며,
어린 동생들을 놀리던 팔촌누나는...


한 두달 생일차이에 형이라 부르라며 싸우던 사촌 형도...

같은 이유로 오빠라 부르지 않겠다며 싸우던 사촌 동생도...

이제는 다들 담배와 술과 실없는 농담들로
소외된 삶을 보상받아야 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영화를 찍는 팔촌누나는 영화인 노동조합원이다.

노동조합이 무언지도, 운동이 무언지도 몰랐던 누나는 삶이 너무나 힘들어서, 노조에라도 가입하면 무언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가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우리 누나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채 달달이 만원의 회비만 인출해 가고 있다 했다.


공연을 보고, 클럽 다니기를 좋아하던 사촌동생은 문화운동 단체에서 일을 한다.
문화운동을 하는 자들의 언행불일치에 치를 떨고 있다고 한다. 겉으론 진보를 말하고 개혁을 부르짓는 자들의 시꺼먼 속과 엘리트 의식이 역겹다고 말이다.


삼수를 하고 대학에 입학해 군대에 다녀온 형은 아직 대학 1학년이다.

짜여져 있는 교육과정이 너무나 싫어 고등학교 교육을 포기하고 대안학교에 입학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했던 형은 대안학교에서 대안이 아닌 절망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진보를 팔아 사기를 치는 장사꾼이었다고 말이다. 사회가 변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는 사기꾼들이라고 말이다.


장손이라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는 팔촌형은 사범대에 진학했다.
선생님이 되는 길도 이제는 그리 쉽지 않아 힘들다고 했다. 안정적인 취업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던 자신의 미래의 또다른 기회들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채 오직 그 길만을 위해 노력해도 전망은 밝지 않다고 말이다.


2008 추석 연휴, 전국에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이 역대 최대라 한다.

앞집, 뒷집, 이웃에는 화목한 웃음 대신 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늙은 부모의 한숨만 가득하다. 부모님을 모시기에 부담스러운 형제들의 언성만 높아간다. 

지금이 너무나 끔찍하다고, 너무나 슬프다고, 술을 마시며 서로 부둥껴 눈물을 흘리는 풍경이 그나마 아름답다.


이럴진데, 그 누구의 입에서도 이런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말은 쉬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전처럼 '철없는 녀석'취급은 받지 않는다. 너무나도 끔찍한 현재를 바꿔야 함에는 이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알 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철이 없었던, 대학을 다닌건지 데모를 다닌건지 알 수 없는 사촌동생의 여전히 철없는 소리가 이제는 위안처럼 들릴뿐이다.


추석 전날 저녁 술자리는 그렇게 무르익었다. 큰아버지와 둘째 작은 어머니가 제사와 사업 문제로 싸우는 소리를 반주삼아, 경제 이유때문에 별거중인 작은아버지의 초라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이제는 '어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버려진 이들의 술자리다.


이들은 서로를 짓밟지 않아도 되서였을까. 즐거운 이야기도 흥미로운 소식도 없는 무료한 자리는 밤이 깊을수록 무르익어간다. 옛 추억과 현재의 고단함과 미래의 절망이 버무려져 속은 쓰리지만 함께라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이들은 모두 세상이 지랄같다고 말한다.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 철없는 사촌동생의 철없는 소리에 귀가 조금 더 기울여질 뿐, 그리고 알 수 없는 위안을 그 이야기에서 얻을 뿐.

사촌 동생은 촛불운동을 열심히 하다 경찰에게 연행되었었다고 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모두가 완전하진 않지만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대안이라 했다.

'다함께'라는 진보단체의 회원이라 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는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다고 말했지만,
이 사회의 미래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말했다.

자신은 그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녀석은 함께 하자 말했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