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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불교적인 기독교, 기독교적인 유교의 핵심은 ‘문화’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불교적인 기독교, 기독교적인 유교의 핵심은 ‘문화’  

작성일: 2007년 1월 24일
박용석/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 의문 1
만약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든지 “자업자득”,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이단일까 아닐까.

폐쇄적인 개신교회에서는 이단 판정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 불교 용어이며, 불교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 의문 2
한국 대형 교회에서의 대규모 부흥회나 통성기도는 기독교적일까, 반기독교적일까. 그리고 한국 기독교에서 유달리 많이 볼 수 있는 새벽기도회나 새벽미사는 과연 얼마만큼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 실천의 모습에서 기독교보다는 무속 신앙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전자는 흔히 말하는 ‘굿판’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새벽 시간의 종교 의식 역시 무교적 분위기 내지는 새벽 예불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문화는 별개이면서도 별개가 아니다

 지난 23일(화), ‘文으로 化 하다-한국종교문화론’이라는 주제로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진행된 이찬수 교수의 종교 강좌 3번째 강의에서는 현대 종교의 복잡한 현상을 짚어보았다. 많은 종교인, 비종교인들이 종교 그 자체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을 한다. 고민의 근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하나인 듯 하면서도 다양하고, 다양하지만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 같은 현상 즉,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진리를 부정하지 않되, 다양한 ‘진리 현상’에 대한 이해와 관용적 태도를 통해 진리의 참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진행된 지난 강의에 이어 이 교수는 ‘문화’라는 개념어 이해를 통해 종교를 이야기하였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화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substance)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Form)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종교가 문화 ‘안’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문화가 종교의 형식’이며, 종교가 문화를 규제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종교는 문화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이러한 명제는 하나의 문화와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종교간 관계에서만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에 다양한 문화 그리고 다양한 종교가 동시에 공존하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다양한 종교 현상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교수는 “종교가 다양하면 그만큼 다양한 문화적 형식이 있는데,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면서도 한국적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포괄적인 틀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종교들의 존재 이면에 통일적이고 심층적인 근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면면에 스며있는 ‘초월적인 종교 문화’, 혹은 ‘종교 이전의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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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는 진행형의 동사

 ‘문화(文化)’는 순우리말이 아닌 ‘Culture’란 외래어를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이다. 이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일종의 명사형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문화는 매우 역동적인 의미에서의 진행형의 동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문화를 고정된 의미의 명사로 보는가 또는 변화의 의미에 중점을 두는 동사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이 교수는 “문화란 인간 활동의 가시적인 소산의 총체다라는 정의가 문화를 명사로 이해하여 문화를 마치 고정불변의 외적 대상물로 제한하는 한계를 갖는다”라고 지적하며, “문화를 대상화하는 인식 행위 자체가 이미 문화의 소산이며, 현대 사회 문화의 일부 특성”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인간은 세계 내 존재(Being-In the-World)’라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려, “인간은 문화 내 존재(Being-In the-Culture)”라고 표현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인간은 문화를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100여 년 전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당시 조선인의 종교 상황에 대해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처했을 때는 무속신앙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이 교수는 이것을 종교가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것일 수 없다는 증거로 제시했다.

 “한국의 도교, 유교, 무교, 불교, 기독교 등이 서로 공존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배타적인 종교들인 듯하지만, 만약 이들이 진정 차별적이라면 현재와 같은 공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은 공존하고 있는데, 각 종교들의 이면에 보편성, 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현상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 운동이나 개신교의 타종교 비판과 같은 종교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교수 자신도 강남대로부터 종교적 이유로 배척을 당했다.


‘나와 너’ 그리고 관계

 “일반적으로 문화와 종교는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에 있으며, 문화가 종교이고 종교가 문화인 상즉(相卽)적인 관계입니다. 각각의 개별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이전의 문화를 고려해야만 한다.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유입될 당시, 이미 한국 사회에는 그 이전부터 불교, 유교, 도교, 무교 등의 다양한 종교가 만들어 낸 사회 문화 또는 종교 문화가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선교사들의 ‘God’은 ‘천주(天主)’가 되었다. 물론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신(神)’을 하늘의 주인으로 풀이하는 곳은 없다. ‘천주’라는 개념은 중국인들이 이미 3천여 년 전부터 사용해 왔던 ‘상제(上帝)’ 개념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God’을 이해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사람들은 ‘천주’를 순 우리말로 가다듬어 ‘하느님’, ‘하나님’으로 받아 들였다. 물론, 서양 언어 ‘God’에는 ‘하늘’이란 뜻도, ‘님’이란 뜻도 들어 있지 않다. ‘하늘의 주인’ 또는 ‘하늘에 계신 님’이라는 한국 고유의 문화 의식이 개입된 것이다.

 “마틴 루버가 말한 ‘나와 너’란 명제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나 ‘너’가 아니며 ‘와’입니다. 나와 너는 서로의 관계(‘와’)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이전에 도교, 불교, 유교 등의 혼합적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한국적인 기독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종교와 종교 문화에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이 교수는 종교를 자신 안에 가두는 차별적인 종교관은 신을 가두는 것이라고 못 박으며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끊임없는 상호소통이 진정한 종교적 실천”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실천의 중요한 계기는 상호 교감이다.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착한 이유는 단지 그가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못 본채 지나친 제사장과 달리, 그 사마리아인은 원수와도 같은 유대인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구해줬기 때문이다. 그는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 섞인 호소와 교감하였다.  예수는 그러한 교감에 따른 실천을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실천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타종교를 배척하는 일부 종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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