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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글.


동거녀의 임신... 무능한 청춘의 선택은?
['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②] 그간 우리의 삶은 유예기간이었을 뿐

11.11.26 14:08 ㅣ최종 업데이트 11.11.26 17:49

박용석





나와 그녀의 첫 만남

 

전두환 전 대통령 각하를 즈려밟고 교과서에서 사라질 5월 광주. 하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새롭게 적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 박용석  망월동 국립 묘역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기자란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한국은 기존의 역사가 너무나도 끔찍했기에 새로운 역사가 절실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언제가 그 꿈을 슬며시 접었다. 어떤 한 가지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 중에 기자도 있는 거지, 기자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란'것이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현대 사회에선 기자조차 단지 '직장인(그저 돈을 벌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때론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는 말이다. 다행히 '직장인'과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언론과 언론인들이 때때로 감동을 전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의 삶은 늘 외압과 회유에 노출되어 위험했다. 그 중 가장 큰 위험은 그들조차 언제나 '직장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얽매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다. 

나와 그녀의 첫 만남은 내가 아직 기자가 되고 싶어하던 때에, 대학 신문사 수습기자로 들어온 후배 기자들에게 신문사 퇴임 선배랍시고 저널리즘 교육을 하겠다며, 앞서 지껄였던 소리를 좀 더 장황하게 늘어놓던 때였다.

그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대학에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더 어린 새내기 후배들보다 어딘가 조금은 더 세련되고 눈에 띄는 인상이었다. 물론 그때는 2007년이었고 그때부터 우리가 사귀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좀 더 세상에 찌들고 나서 다시 만났다.

'가출초보'와 '막내작가'의 만남  

 

 

세 명의 전직 대통령 "두 전직 대통령과 학살자 하나 추가요." 하지만 '기자'는 아무도 이렇게 적지 않는다. '기자'는 이렇게 적을 수 없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사실 이번 가출은 두 번째였다. 가출 중에 잠시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가출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간격이 짧았다.

애초에 난 어쭙잖은 수배자 신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진행된 재판의 1심에서 벌금 300만 원을 선고 받았다. 벌금을 부모님에게 내달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2010년의 봄, 당시 26살의 나이였고 부모의 경제력에 기생하며 산다는 것이 점점 죄스러워지는 나이였다. 집을 나왔다. 첫 번째 가출이었다. 물론 청소년 시절의 이유도 목적도 불분명한 철없는(지금도 철은 별로 없지만) 가출은 제외하고 말이다.

단돈 50여만 원이 전 재산이었다. 고시원 방을 하나 구했다. 인근의 식당에서 평일, 주말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쉴 새 없이 일했다. 벌금과 변호사 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녀를 다시 만났다. 어느새 계절은 여름이었고 화창한 여름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그녀도 나도 너무나 잔뜩 찌들어 있었다. 그런 우리는 서로 무안할 정도로 너무 금방 알아봤다.

그녀는 대학 신문사 퇴임 이후 졸업을 1년 남겨두고 방송 외주 회사에서 '막내작가'로 일하고 있었다. 반가움에 내친김에 술 약속을 잡았다. 이후에도 우리는 종종 만났고, 만남은 점점 더 잦아졌다.

그녀의 술버릇은 고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한 달에 40여만 원에 불과한 임금에 휴일도 없이 24시간 항시대기 상태로 근무해야 하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방송 3사 중 하나의 생활교양 프로그램으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프로그램인데도 그랬다.

그녀와 나의 단 둘뿐인, 서로의 고난을 성토하는 술자리는 시작하면 끝날 줄 몰랐고 외박은 잦아졌다. 벌금을 벌기 위해 모은 돈은 조금씩 탕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철없는 막내아들로 되돌아간 것이다. 만사 제쳐놓고 나와 그녀가 포근히 쉴 우리 둘만의 공간이 절실했다.

'꿈같아서 불완전한' 동거 시작, 그리고...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6·2지방선거가 개혁 세력의 승리가 됐다. 이로서 나에겐 나의 방이 생겼다.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모아둔 돈으로 창원에서 출마한 시장 후보를 후원했다. 물론 빌려줬지만 받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후원했다. 평생을 노동운동에 매진한 선배의 출마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준 돈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약속했다. "니네 당 전 당수가 이번 선거 약진해서 엄마 돈 갚으면 네 방 보증금 해줄게"라고. 물론 순전히 내가 졸라서 그걸 달래기 위한 임시방편의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다.

난 2007년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고, 당시 당대표가 문성현 창원시장 후보였다. 천안함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문성현 후보도 당선은 아니었지만 선거 비용 전액을 돌려받을 수 있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선거 초기에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풍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나와 그녀가 편하게 쉴 방이 생겼다.

처음부터 동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며 돈을 모으기엔 빠듯했기에 룸메이트를 구하려 했다. 그리고 월세를 나눠 내면 주말 아르바이트 하나를 그만두고 조금은 여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고된 업무와 우리의 박한 주머니 사정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점점 더 집에서 만나는 날이 잦아졌고, 그녀가 새벽 두세 시를 훌쩍 넘겨 퇴근하는 날에는 집에 갈 수도 없어 자고 가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는 이전에는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침대나 소파(심지어 남녀 구분조차 없는 공간)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불완전한 동거가 시작됐다. 2010년의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 '일'이 벌어졌다. 불안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선택

▲ MB, 그가 당선됐던 2007년에는 2008년에 쓴 나의 글에서 "20대가 보수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나의 보수화 되지 않은 자아정체성을 증명받지 않으면 마치 육체와 정신이 분열하여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은 심정으로 열정을 바쳐 선거에 임했다. 그리고 그렇게 2008년은 다가왔다"라고 적었다. 
                                                                                                                       ⓒ 박용석  민주노동당  

 누구나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이면 아주 복잡한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러나 답은 둘 중 하나였다. 임신중절하고 그녀와도 헤어진다. 아이를 낳고 그녀와 결혼(사실혼 관계를 포함)한다. 아무리 복잡하게 수식어구를 가져다 붙여도 종국의 선택은 둘밖에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말이 20대 청년들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10대들에게도.

질풍노도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임신 소식을 듣고 소위 '패거리' 친구들끼리 "이 친구가 여자친구와 100일이니 돈 내라"며 전교를 돌아 '100일 삥'을 뜯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성인인 동네 '건달' 형의 도움으로 낙태시술을 할 수 있었다.

10대였고 미성년자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사실 지금의 20대는 어쩌면 미성년자보다도 더 무능한지도 모르겠다. 전교를 돌아 '삥'을 뜯을 능력조차 결여되었으니 말이다. 미성년자들이 그렇게 하면 어린 시절 치기로 다소 눈감아주기라도 하지만, 성인이 그렇게 하면 그건 완벽하게 범죄가 된다.

어쨌든, 이런 끔찍한 경험을 '성인'이 되어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우물쭈물하며 걱정하는 그녀에게 "그럼 결혼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안 그래?"하며 웃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은 그런 우리를 이해해주셨다.

그리고 유예기간

방의 계약기간이 거의 끝날 때까지만 자취방에서 같이 지내고 아이의 출산이 다가오면 시댁에 들어와서 지내는 것. 다음 학기엔 둘 다 등록하고 최대한 빨리 졸업해 취업할 것 등 몇 가지 간단한 단서조항에, 한 달 생활비 150만 원을 지불하는 부모와 어린 부모간의 계약이 체결됐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임신중절하고 사랑하는 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쥐뿔도 없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스스로의 능력으로 가족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의 유예기간까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잊고 있었다. 이것이 유예기간일 뿐이라는 걸. 하지만 나는 점점 그 안락함에 안주하고 있었다.

선택은 용감했지만, 유예기간이 주어지자 느슨해져버렸다. 그러던 내가 깜짝 놀라 집을 나오게 된 거다. "너 이러면 안 돼"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어쩌면 그보다도 더 전부터 나의 삶 자체가 유예기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그녀라는 걸.

이런 내가, 그리고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저 갈팡질팡, 위태롭게 휘청대는 것뿐일까?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게 나의, 그리고 우리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이 글은 애초에 불완전한 기획이었다. 나는 이 물음들에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적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지난글 : ['가출청년'의 결혼·육아 수난기①]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Posted by 아프로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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