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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살맛나는사회

32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법 앞에서 _ <인권연대> 기고. 2012.05.16

 

32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법 앞에서

                                                   _  박용석. 2012.05.16 <인권연대> 기고

 

 

 

 

어머니는 광장에 서서 소리쳤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룬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 아들이 끌려가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이제 겨우 50줄 나이지만 등이 조금 굽은 어머니다. 모진 고문 탓에 가슴뼈가 주저앉아서다. 어머니는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5.18민주화유공자’다. 그런 어머니가 인터넷 생중계로 막내아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했기 때문이었다.

 

법 앞에서

 2008년 6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사회 단체 농성 천막이 철거될 때 연행된 10명 중 한명이 나였다. 우리는 48시간을 꼬박 채워 유치장에 구금당했다. 풀려난 후엔 2년이 넘도록 십여 차례 재판도 받았다.

 

 당시 우리의 죄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와 ‘도로교통법위반’이었다. 담당 검사는 서울시청 앞 광장이 도로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리곤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우리가 ‘전문시위꾼’이라 선처의 여지없이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며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무죄였다. 어려운 법률 용어가 잘 이해되진 않지만 간략히 요약하면, 서울 시청 광장은 도로가 아니란 것. 무허가 시설이라도 미리 고지하지 않은 채 강제 철거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경찰과 서울시 공무원의 강제 천막 철거는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아 정당한 공무집행이라 볼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이에 저항한 것은 무죄란 것이 판결 요지다.

 

 2년이나 걸려 겨우 받아낸 무죄였다. 그렇지만 후련하진 않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난 되레 상실감을 느꼈다. 이 판결은 불법의 주체가 국가 권력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를 가두었던 경찰과 공무원, 그리고 억지를 부려가며 나를 기소해 재판에 출석케 한 검찰이 죄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당한 연행과 구금, 재판의 본 목적이 따로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쓸데없이 저항하면 불이익을 받고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말이다.

 

다시 법 앞에서

 물론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연행 사유가 위법하거나 그 과정에서 경찰이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무죄가 된다. 무죄가 확정되면 그에 대한 보상도 한다. 형사보상이란 법 덕분이다. 형사보상은 형사재판에 한해 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후, 구금과 재판 출석 일수에 대해 법정최저일급의 최대 5배까지 보상을 하도록 정한 법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문제다.

 

 형사보상을 받으려면 연행과 구금, 재판 출석과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증빙하는 자료를 모두 해당 개인이 준비해야 한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개인이 이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모든 과정을 법률 전문가인 법정대리인, 즉 변호사를 선임하여 처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임비용을 생각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오죽하면 형사보상이란 제도를 알면서도 그 권리를 포기하기도 한다. 2008년에 나와 함께 연행됐던 다른 9명 중 7명이 그랬다. 다른 2명도 생계 때문에, 혹은 다른 재판에 쫓겨 거의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다.

 

 재판 출석 일수 증빙을 위한 재판기록 사본과 ‘무죄판결확정증명’은 본인이나 법정대리인이 직접 방문해야만 발급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사는 곳이 광주나 부산, 심지어 제주도라도 서울에서 연행되고 재판을 받았으면 해당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서울까지 와야 한다.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구금되었다면, 해당 기관에 ‘정보공개청구’를 해 구금 사실과 기간도 입증해야 한다. 인터넷으로도 신청 가능하지만 자신이 연행되어 구금 됐던 일시와 기간, 사건번호를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 아버지 생일이 기억나지 않아 스마트폰 다이어리에 검색했는데, 되레 스마트폰이 “아버지 생일을 입력하시오”라고 묻는 꼴이다. 결국 직접 방문해야 한다.

 

 기한도 정해져 있다. 구금과 구속에 대해선 '무죄재판의 확정된 사실을 안 날부터 3년' 이내에 청구하지 않으면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마저도 청구기한이 1년이었던 것이 2011년 5월에야 개정됐다. 변호사 선임 비용 등 재판 비용에 대해선 그 기한이 6개월로 더 짧다.

 

 기한이 문제인 것은 이 법을 알지 못해, 혹은 어떤 다른 이유로 청구 기한이 지났더라도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비용에 대해선 보상을 받지 못한다. 이 법을 너무 늦게 알았다. 6개월은 이렇게 너무 짧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물론 구금과 구속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3년은 짧은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죄가, 죄가 아니었음이 입증되기엔 턱없이 짧다. 오랫동안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은 거론하는 것만으로 죄가 됐다. 최근 ‘5.18민주화유공자회’는 독재정권에 의해 구금됐던 이들이 형사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유공자’라곤 하지만 구속 기간을 제외하곤 보상 받지 못했다. 어쩌면 구속 기간보다도 더 가혹했던 구금과 조사 기간은 증빙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구속 기간마저 보상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한국의 잔혹한 역사 속에서 단지 1980년, 광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주에서, 부산과 마산에서, 그리고 광주 이후 지금까지도 권력에 의해 짓밟힌 무수히 많은 권리들이 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들 중 대다수는 여전히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목숨을 건다.

 

또 다시 법 앞에서

 때문에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형사보상을 받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어머니 굽은 등은 못 펴드려도, 세상을 조금은 바꿔냈다는 자긍심마저 굽지 않는 방법이 형사보상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아직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되지만, 그조차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내가 당한 고난은 그들 앞에선 겨우 아이들 재롱 수준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몇 번 헛수고를 하고선 관련서류들을 서랍 구석에 처박아 뒀었다. 법원에서 내 재판 기록을 열람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죄평정’ 중이라며, 상급법원에서 해당 재판기록을 대여 중이라며, 그렇게 세 번 헛걸음을 했다. 그리곤 “대여한 재판기록이 언제 반납될지 알 수 없다”는 황당한 대답을 들었다.

 내게 ‘쓸데없이 저항하면 불이익을 받고 귀찮아진다’는 것을 일깨워준 이 나라의 법이었다. 형사보상은 ‘쓸데없이 보상을 받으려다간 더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목숨을 걸고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룬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란 어머니의 외침은 내게 점점 진실이 됐다.

 

 내가 깨우친 그 진실은 아직도 법이 만민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 동안 처박아 뒀던 형사보상청구 관련 서류를 다시 꺼내본다. 아주 작은 권리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인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32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법이 우리의 권리도 지켜주게 하기 위해. 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지 않기 위해. 나아가 법 앞에서 평등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