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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살맛나는사회/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

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년 2. - 한 소띠(85년생) 청년이 바라본, 촛불의 방어를 위한 노력과 경제위기의 심화

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년- 두번째 이야기.
- 한 소띠(85년생) 청년이 바라본,
   촛불의 방어를 위한 노력과 경제위기의 심화

분기점을 넘지 못한 운동은...?


지난 연재에서 재협상 최후 통첩 시한 이후 정권 퇴진운동으로 나아가지 않음을 택함으로 분기점을 넘지 못한 촛불은 점차 소강기를 맞게 되었다 했다. 수배자들이 생겨났고, 수배자들은 조계사에 농성장을 차리게 되었다.
 월간 '말'  8월호의 표지- 현재 단 한명을 제외한 수배자들 모두가 연행되었다. 아직 촛불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을 잊지 말자. "역사가 우리를 승자로 하리라" 

이들은 '범죄(죄를 지음)'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배라는 악조건에서도 운동의 방어를 위해 조계사로 그 거처를 옮겨 끝까지 항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지난 기사>
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년. 첫번째 이야기.
- 한 소띠(85년생) 청년이 바라본,
   이명박 정부 출범에서 촛불운동까지
                               中 일부 발췌
 
운동은 그간의 여러 논쟁들을 극복해가며,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마지막 논쟁. 정권퇴진 불사 논쟁에서 이 운동은 소강기를 맞이하였다. 최종 협상 시한을 못박았음에도 오히려 그 시한 이후 운동의 발목을 잡으며 운동이 더욱 전진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이명박과 한나라당에게 반격의 기회를 내주었다. 지난 촛불운동 내내 운동의 수렴점이었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대한 불신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고, 앞서 진행된 모든 논쟁점들이 다시금 표출되기 시작했다.

'의회주의 온건 개혁세력'들은 운동의 분기점을 그렇게 정체 시켰다. 정체된 운동은 점차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반격의 여지를 내어주게 되었고 수배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렴구를 찾지 못한 운동은 치열한 논쟁점을 남긴채 점차 수그러 들었다. ('온건 개혁세력', '의회주의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들은 당시의 치열했던 투쟁에 함께 나선 소중한 동지들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시의 전략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생각한다) 

 
일부 단체는 그간 지속된 논쟁 중 하나를 꺼내 들며,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가 국민들을 무시한 채 이들을 지도하려 했기에 국민들로 부터 신뢰를 잃게 되었고 지금부터는 모든 것을 국민들의 자발성에 맞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전혀 타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자발성과 상호지도, 그리고 이를 통한 운동의 방어는 절대 양립하는 것이 아니다.

 ◁ 거리 홍보전을 하는 다함께 회원들(위)과 촛불시위를 준비하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자원 봉사자들(아래) - 촛불시위 성장에는 이런 조직된 단체의 구실이 중요했다  <자료출처> '맞불' 90호, 촛불의 잠재력과 과제 中

그러나 한번의 거대한, 그리고 매우 중요한 분기점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채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  '대책회의'에 대한 불신은 엉뚱하게도 이 전혀 타당하지 않은 주장에 다수의 대중이 휩쓸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운동은 혼란에 빠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의 분노를 수렴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렴구로서 '대책회의'의 영향력은 비록 축소되었을지라도 매우 주요했다. 촛불을 대표할 수 있는 기구는 여전히 '대책회의'였다.

이제부터의 논쟁은
이 교착상태가 얼마나 지속 해야 할 것인지,
의회가 대중의 염원을 결정하도록 해야하는가 하는 것인지,
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었다.

운동이 교착 상태에 노이며, 저들(MB정권, 한나라당)은 운동을 점차 조여오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발점은 6월 27일, 서울광장 천막 철거였다. 이 날은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안타깝게도 지지부진하며 이명박 정부에게 말미를 준 기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이날의 기억은 나에게 무척 생생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끝까지 시청앞을 지키다 연행된 10인 중 한명이 바로 나였다.



시청 앞 공간은 단순히 농성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친 정부'의 '삽질'을 막아내기 위한 운동에 찾아 온 잠시간의 교착상태를 방어하기 위한 제1저지선이었다. 그리고 운동이 분출할 때에는 대중들의 요구가 분출할 '해방구' 였다. 운동의 '제1저지선'이자 '해방구'가 저들의 폭력에 무참히 짓밟혔다. 이명박 정부에 잠시 여유를 내어준 것에 따른 뼈아픈 결과였다.

 석방되자마자 다시 시청으로 달려갔다
<맞불> 94호 (기사 입력일 : 2008-07-03 )
-박용석

 지난 27일 시청 앞 광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해방구’로서 시청 광장을 정부에 고용된 용역깡패와 폭력경찰이 무참히 짓밟은 것이었다.

이날 10명이 연행됐다. 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 나는 경찰이 주장하는 ‘집시법’, ‘도로교통법’, ‘공무집행방해’ 중 그 어느 것 하나 위반하지 않았음에도 수십여 분 동안 폭행당했고 46시간 동안 강제 구금됐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덮어씌우는 것에 맞서 싸워야 했다.

난 죄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심지어 연행돼 있는 동안에도 맞서 싸우는 것이 우리 운동의 정당성을 더욱 높이는 길이었다. 내가 저들의 꼼수에 말려 묵비를 풀고 단 한 가지의 사실(실은 거짓)이라도 ‘자백’하게 하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다. 혼자서 치러야 할 매우 가혹한 싸움이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그리고 29일 오후 1시에 석방되자마자 다시 시청 앞 광장으로 달려갔다. 

 
원칙적 (절대적) 비폭력주의의 대두
이제 이 폭압정인 정권의 폭력에 맞설 방안은 무엇인가? 운동은 경찰의 폭력에 무참히 짓밟히며 점차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진정 이명박 정권 하의 대한민국은 경찰의 곤봉과 무력으로 국민을 다스리는 7~80년대로 회기하는 것인지. 다시금 절망이 엄습해 왔다.

이때 말 그대로 혜성(정말 이 표현이 잘 어울릴 듯 하다)처럼 등장한 이들이 있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시작으로 한 범 종교계의 촛불 지키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등장은 경찰의 폭력을 방어하며, 대중들의 염원을 방어하는 매우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6월 30일]국민존엄을 선언하고 교만한 대통령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 <자료출처> [다함께] 사진자료실 

 [7월 3일] 국민존중 선언과 평화집회 보장을 위한 기독교 시국 기도회 <자료출처> [다함께] 사진자료실
 [7월 4일] 국민주권수호 권력참회 발원 시국법회 <자료출처> [다함께] 사진 자료실

운동의 방어를 위해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종교 본연의 '평화(비폭력)주의'는 저들의 폭력을 방어하기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운동의 교착상태를 방어해 주는 큰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의도(촛불을 방어하고자한)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전부터 지속 된 또 하나의 중요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바로 '폭력-비폭력 논쟁'이 주요 화두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계는 이 논쟁에서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고 종교 본연의 '원칙적 비폭력 주의'는 체제의 폭력에 맞서는 정당한 물리력 행사마저 제한하는 의도치 않은 효과마저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찌보면 정부의 무차별적 폭력에 처참히 짓밟힌 대중들의 공포와 불안감이 '원칙적 비폭력주의'를 통한 운동의 방어를 위해 종교계의 참여를 갈구했고, 종교계는 이에 응했다 표현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 같다.

 폭력과 비폭력, 중요한 것은 단결
<맞불> 92호 (기사 입력일 : 2008-06-19 )
-박용석
 <맞불> 91호의 ‘체제의 폭력에 맞서는 효과적 방법’ 은 매우 인상 깊은 기사였다.

24일 첫 거리행진 때는 ‘청와대로 진격’할 것을 주장하던 이들이 10일 1백만 촛불대행진에서는 ‘비폭력’을 외치기 시작했다. 겉으로만 보면 경찰 폭력과 우파들의 공격에 주춤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스크럼을 짜고 시위대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예비군들, 경찰 차량을 끌어내는 사람들, 이들에게 환호하는 시민들 ─ ‘절대적 비폭력주의’는 이와 같은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에 맞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무기 중 ‘물리적 폭력’이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함을 시위대는 경험으로 판단하고 있다. ‘비폭력’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시위에 참가할 수 있는 공간을 확장했다. ‘비폭력’ 구호는 우리의 전투력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시키고 있다.

다만 우려할 점은 ‘비폭력’ 구호로 인해 ‘의회주의’적 대안이나 ‘온건 노선’으로 운동의 일부가 돌아서는 것이다. 이명박 하수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는 절대 대안이 될 수 없다. ‘비폭력’을 외치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 우리에게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이지 ‘적당히 하자’는 ‘온건노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후퇴'였다. 저들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한 일보후퇴와 숨고르기였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보후퇴는 바리케이드 저편의 이명박과 그 하수인들에게 뿐 아니라 바리케이드 안의 '온건개혁주의'자들에게도 운동 내 급진 세력에 대한 공세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

운동은 대중의 염원과는 상관없이 점점 더 '온건개혁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수렴되어 갔다. 그것은 운동의 '소강기의 장기화', 내지는 운동의 '소멸'을 의미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한참 촛불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은 뜬금 없다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2008년을 이야기 하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촛불이지만, 촛불을 이야기 하며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경제위기의 심화와 신자유주의화다. 이것을 별개로 놓고는 대중의 거대한 운동을 설명할 수 없기에 조금은 둘러가더라도 차근차근히(그리고 부족하지만 나라는 개인이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풀어가도록 하겠다.

 이것은 이명박에 맞선 노동자들의 시위가 아니다. 바로 노무현에 맞선 거대한 노동자 투쟁이다. [2005년 5월 노동자 대회]
<자료출처> 전국대학신문기자연석회의 사진분과 자료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김대중-노무현이란 두 사이비 진보 정권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두 정권은 개혁적인 열망을 받아안고 당선되어 오로지 그들의 염원을 철저히 배신하는데에 자신의 임기를 할애했다. 이 두 정권이 어떻게 대중들의 염원을 철저히 배반해 왔는지 이야기 하기 위해 1997년 외환위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1997년의 '국치일'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 아이돌 그룹 'HOT'의 '행복' 뮤직비디오는 당시의 음울했던 한국경제상황을 보여준다. 뮤직비디오의 내용 중 부도를 맞아 집의 가재도구를 차압 당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상업적 대중문화에마저 투영될 만큼 당시 경제위기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재미있게도(슬프게도) 나는 이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해야 했다. 조그만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나는 부도 난 회사에 매여 빚더미에 쫓기는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던 가장의 고통을 덜기 위해 외가가 있는 시골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해 추석,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나를 꼭 끌어안고 우셨다. 아마 80년대생 청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그리 생소한 것이 아닐 것이다. 


△노숙인의 실태와 특성 - 노숙인 110명 심층 면접 자료&10,373명 상담 결과(1999년)
◁ 거리에 넘쳐나는 노숙인들.
<자료출처>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노숙자, 정리해고-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했다. 거리에 노숙자들이 넘쳐났고, 경제위기의 공포가 전국을 휩쓸었다. '사랑의 금모으기' 따위의 고통 분담 논리가 횡행했다. 국가경제를 위해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고통분담은 고스란히 가난한 자들에게 떠 넘겨졌다.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졌고, 심지어 온전한 삶과 생명을 위협 받았다.

그들은 졸라맸다. 노동자, 서민의 삶과 미래를

고통을 분담하자며, 대기업들은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대규모 해고를 강행할 수 있었다. 비정규직의 비정상적 비율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하는 시기도 이와 맞물린다. 물가는 폭등했고, 임금은 줄어들었다. 이 절망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이 경제위기는 다행히(?)도 닷컴호황(90년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의 IT업종 주식가 상승을 통한 호황)이라 불리는 미국발 경제 호황으로 그 탈출구를 열 수 있었다.
 ※닷컴 호황은 미국발 경제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폭풍전야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려 한다.

 △ IMF 경제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 ─ 재벌들은 금 수출을 조작해 부당하게 2조 원의 세금을 환급 받았다
<자료 출처> '저항의 촛불' 1호 기사 中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1997년의 경제위기는 극복되었다. 아니 극복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복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을 수반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경제위기에 고통을 분담하자며,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말했던 이들은 오히려 부자가 되었다. 가난해진 것은 노동자 서민 뿐이었다. 경제는 계속되는 저성장을 기록하고 있었고 고통분담의 논리는 10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던 고통 분담은 그 어느 면에서도 '분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노동자 서민들을 더욱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구조조정의 공포에 떠는 노동자들을 더욱 불안정한 일자리로 몰아넣고 보다 강도 높은 착취를 가하였던 것이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한 구조조정이 이뤄진 것이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취업박람회- '88만원세대'에게는 취업인 인생의 수단이 아닌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자료출처> 민중의 소리 자매지 매일노동뉴스 기사 中

청년세대에게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절망과 체제의 논리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취업을 위해 목을 매야 하는 '착하고 말 잘듣는' 노동예비군이 되어갔다. 정당한 불만과 분노가 없어서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정권의 폭압에 순응하는 '절망의 세대'의 출현이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20대의 보수화'라 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이들에 대한 지원, 노동유연성 강화(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하는 것), 공기업의 민영화, 등을 골자로 한 신자유주의화가 본격화 된 효과다.
신자유주의의 본격화는 자본만의 자유였고, 자본은 노동자들의 피를 더 내놓으라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두번의 배신
지난 연재에서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차선을 넘나들며 역주행 하는 불도저' 정권을 출범시켰다 했다. 

 △ 1998년 사측의 정리해고에 맞서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인 현대차 노동자들 — 노조 지도부의 불필요한 양보가 없었다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료출처> '저항의 촛불' 8호 기사 中

김대중 정권이 IMF의 구조조정안을 밀어붙이며 추진한 신자유주의화에 그 어떤 저항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의 주요 골자 중 하나인 고용유연성을 위한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와 임금삭감에 맞서 현대자동차 노조는 강경한 총파업으로 맞섰다. 아직까지도 이 때의 경험 덕분에 현대자동차 노조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나라당과 조중동 찌라시가 '귀족노조'라 부르며 두려워 하는 강력한 노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주요한 골자였던 공기업 민영화 방안도 밀어붙였지만(한국통신 등 민영화), 전력공사를 쪼개서 민영화 하려 했던 것에 맞선 화력발전소 노조의 강경한 투쟁으로 이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런 저항은 '새천년민주당'에 대한 지지 철회와 함께 새로운 개혁세력의 등장을 염원했다. 그리고 그 개혁의 염원은 민주당 내 개혁세력의 일부에게 쏠렸다. 그 염원을 받아 출범한 것이 '노사모'열풍과 함께 등장한 노무현 정권과 '열린 우리당' 창당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배신 역시 큰 실망감과 분노를 안겨주었지만, 노무현 정권의 배신은 더욱 큰 분노와 실망일 수 밖에 없었다. '미군의 효순양 미선양 살해 규탄 촛불운동'과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운동'은 노무현이란 사이비 진보개혁 정권에 대한 대중의 염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염원은 거리의 대중행동으로 표출될 만큼 큰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이를 철저히 배신했다. 한나라당에서 광우병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며 때때로 제기했던 '설거지론'을 필 수 있는 것은 바로 노무현과 이명박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놓고 밀어붙이는 것과 살살 구슬리고 속여가며 꼼수를 부린 차이 정도다.

 2005년 [한-미FTA반대시위] 서울 종로구청 앞-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분사한 소화기처럼...
노무현도 물대포와 소화기가 없었다면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꼼수라고 하지만 노무현이 이명박과 달리 국민들에게 매우 친절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도 경찰의 곤봉과 소화기, 그리고 물대포에 의존하여 국민들의 권리를 짓밟아 왔다.

 이라크 파병 5년 - 국민혈세 7260억원 탕진,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였다.
<자료출처> 블로거의 이전 글

실상 한나라당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정책의 대부분은 노무현 정권도 추진했던 것들이다. 한-미 FTA, 비정규 악법, 기업규제 완화, 공기업 사유화, 그리고 심지어 파병마저 밀어붙였다. 이라크 파병 5년간 투입된 국민의 혈세가 무려 7260억원에 달한다. 이것은 모두 국민의 혈세이며, 미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중동 석유패권의 떡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더럽고 치졸한 발상이었다. 노무현은 이명박 비지니스 프렌들리 정부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온갖 비리와 추문에도 이전 10년간 '사이비 진보' 세력에 대한 분노의 반사이익으로 권력을 거저 주은 이명박.
<자료 출처> '맞불' 70호 기사 中

신자유주의의 본격화로 인한 노동자 서민의 고통과 이로 인한 실망과 분노는 임계점에 달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2007년 대선은 이와 같은 '분노'가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이전에 치뤄졌다. '분노'보다는 '실망'과 그로 인한 '절망'이 가득했다. 이로 인해 사상 최저의 투표율의 대선이 있었다. 분노보다 실망이 앞선 대중은 기성 정치(의회 투표)에 등을 돌리거나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명박)을 한 것이다.

이 선거결과를 두고 한 외신은 "말도 안된다. 한국의 유권자는 후보의 도덕성은 안중에 없는가?"(정확히 어느 외신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라며 반문하기도 했다. '사이비 진보' 10년 때문에 겪을 비극의 시작이었다.  

고통전가, 그리고 분노의 폭발
-촛불을 이해하기 위해 경제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7월 24일 한겨레 신문 그림판- 이명박의 '경제살리기'의 허구를 단 한장의 그림으로 폭로해 주고 있다. 그들의 경제살리기에 서민의 삶은 안중에 없었다. 그들의 경제살리기는 '부자경제살리기'였을 뿐이다.

이명박의 정권은 그가 말하던 '경제살리기'와는 전혀 딴판의 세상을 만들어갔다. 점차 실체를 드러내는 그의 '경제살리기'에는 노동자 서민의 삶은 없었다. 이명박 정권은 정권의 출범은 동시에 들끓는 대중의 분노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 폭발이 바로 지난 여름의 촛불이었다.

<블로거 이전 글>
되돌아본 2008, 그리고 2009년. 첫번째 이야기.
- 한 소띠(85년생) 청년이 바라본,
   이명박 정부 출범에서 촛불운동까지
  中 일부 발췌

 1. 정당, 사회단체 배제 논쟁
(정당과 사회단체의 참가로 촛불의 순수성의 훼손된다는 논리)

2. 청계광장을 넘어선 행진 여부에 대한 논쟁
(행진은 위험성이 크며, 이는 일부 급진단체의 주장일 뿐이라는 논리)

3. 일부 급진단체 배제 논쟁
(일부 급진단체가 촛불을 주도하려 하며, 이들을 배제하지 않으면 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논리)

4. 폭력, 비폭력 논쟁
(경찰의 폭력에 항거하지 않는 방식으로 '절대적 비폭력'만이 운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

5. 정권 퇴진 운동 경고 시한 이후 전략 논쟁
(정권퇴진 운동은 불가하며 의회로 이 운동이 수렴되어야 한다는 논리)


운동의 성장기에 벌어졌던 위와 같은 논쟁들과 달리 운동의 소강기에 시작된 논쟁들을 설명하기 위해 앞의 경제위기와 대중의 분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촛불운동을 바라보지 못한 이들은 촛불운동을 '광우병 위험 쇠고기'라는 단일 쟁점에 국한해야 한다는 협소한 관점의 주장을 하며 운동을 제한하려 했다. 이것은 완전한 몰이해였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를 수입한 정부에 대한 분노'에는 앞뒤의 문맥이 생략되어 있다. 그 문맥을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경제살리기라는 미명하에 재벌 기업들의 이윤만을 위해 국민의 생명은 아랑곳 없이, 심지어 광우병 위험 쇠고기 마저 수입하려는 정부에 대한 분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이 운동의 방아쇠를 당기는 구실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먹거리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애초에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지난 10년간 사이비 진보 정권에 속아 경제위기 고통 전가를 당할 대로 당한 노동자-서민에게 또 다시 끊임 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촛불운동의 성장기에는 전혀 득세할 수 없었던 이와 같은 협소한 관점의 주장이 촛불운동의 소강기에는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촛불을 접고 민생운동과 시민감시운동으로 이 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찌라시는 쾌재를 부르며 이들과 급진 단체들을 분리시키려 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경제위기의 심화
미국발 경제위기는 전세계에 충격을 전했다. 여러 땜빵식(땜빵이라고 하기엔 너무 값 비싼) 조처들이 남발됐음에도 여전히 경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료출처> 저항의 촛불 11호 - 심화하는 세계경제 위기 ─ Q&A 中

2008년 촛불운동의 시작과 비슷한 시기 세계경제는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2008년 5월, 미국발 경제위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subprime mortgage loan)의 붕괴가 시작 된 것이다. '재벌 프렌들리. 강부자' 정부가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킬 것은 자명했다.

촛불운동 자체가 'IMF 외환위기' 이후 지속된 경제 저성장의 고통을 노동자-서민에게 전가시키는 신자유주의화에 맞선 대중 저항이었기에, 노동자 투쟁과의 결합은 애초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시작은 노동자 투쟁과 촛불의 결합을 더욱 중요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에 다음 연재에서는 촛불운동 전-후 과정에서 노동자 투쟁의 역할과 경제위기로 인한 노동자 투쟁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고자 한다.